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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적 생명공동체 '가족'- 황영성 회화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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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210.♡.209.214) 작성일18-08-12 18:12 조회5,5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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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적 생명공동체 가족- 황영성 회화세계

     

    광주비엔날레 작가스튜디오 탐방 / 2018.08.08, 서석동 작업실

     

    연일 폭염이 계속되는 가운데 88일 오후 2, 광주 동구의 벤처빌딩 옆 황영성 화백의 작업실에서 광주비엔날레 작가스튜디오 탐방 8월의 프로그램이 있었다. 조인호 광주비엔날레 전문위원이 준비한 P.T 슬라이드이미지들을 보면서 1950년대 말 광주사범학교 미술부와 시골학교 교사시절부터 60년대의 인상주의 지역화풍, 70년대 회색조 초가 연작, 80년대 검정과 녹색의 가족 연작, 90년대 단순화된 기호적 구성, 2000년대 종이나 금속판의 음영효과와 스테인레스 볼을 이용한 입체적 공간설치, 2010년대 문자도 표현세계와 최근의 검은 소 연작 등 60년 화업을 2시간 정도에 압축해서 되돌아보는 자리였다. 황화백의 예술과 인생에 관한 얘기의 요지를 정리해 본다.

    광주사범학교를 다닌 것이 평생 화가가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술교사였던 양수아 화백은 그림지도보다는 예술적 낭만과 자유주의자의 정신을 보여주셨다. 그분의 영향으로 비정형추상을 시도해보기도 했는데 지금 한 점 남아 있다. 59년 사범학교 졸업 후 나주 다시남초등학교 교사로 나가있으면서 무등산과 주변의 풍경들을 구상회화로 그렸다. 61년에 5·16혁명이 일어나자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들은 모두 해직되었다. 그래서 조선대학교 미술과에 입학하게 됐고, 오지호 화백의 후임으로 막 내려온 임직순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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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영성 <무등산의 겨울>(1959) / <소녀좌상>(1969) / <겨울여인>(1970)

    임직순 교수 작품감상 시간에 어떤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면서 검정색과 흰색만으로도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다.”했다. 그게 지역의 정형화된 구상회화 대신 70년대에 독자적 대상해석에 의한 회색조 연작들로 전환하게 된 자극제가 되었다. 그때는 반드시 모델을 놓고 그려야만 하던 때라 흑백그림 소재를 찾다가 간호사를 그린 <병동의 오후>(1967)로 국전에서 특선을 했다. 당시는 국전출품이 최대의 관심사이던 시절이었다. 열차에 작품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 역에서 여관까지 소달구지로 운반한 뒤 부서진 액자를 고쳐서 국전에 출품하곤 했다.

    어느 날 박상섭 선배 부친회갑연에 갔다가 마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 석양녘에 초가가 온통 금빛으로 물든 감동적인 장면을 경험하면서 초가를 집중적으로 그리게 되었다. 초가집은 촌스럽다고 잘 안 그리던 때였지만 초가작업을 하면서 컬러풀한 임직순 교수의 작품과는 다른 무채색 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초가는 우리 민족의 자연스러운 조형성이 담겨진 전통이다. 수없이 돌아다니며 수집한 초가 소재를 조합시켜 화면을 구성한 <온고>(1973)로 국전 문공부장관상을 받았는데, 호외가 뿌려질 정도로 특별한 관심꺼리이던 시절이었다. 이후 초가에서 이웃으로, 마을이야기로, 점차 시야를 넓게 보는 구성으로 확대시켜갔다. 당시 오지호 선생님은 당신의 회화세계와 다른 내게 자네 그림은 덜 익었어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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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영성 <온고>(1973, 국전 문공부장관상) / <가족>(1995) / <소의 침묵>(2018)

    1980년 뉴욕한국문화원 전시에 임직순·최영림·윤중식 등 어른들 틈에 끼어 초가마을 6점을 출품했다. 뉴욕의 빌딩숲 속에서 초가집이라니.. 주눅이 들었다. 다른 분들은 피카소전을 보고 낙담하여 계획했던 여행도 포기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자와 평론가들의 관심이 내 작품에 가장 많이 몰려 그림도 다 팔리고 그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혼자 유럽으로 건너가 런던과 파리, 마드리드, 로마, 나폴리 등을 1년여 간 여행했다.

    80년대는 회색조에서 녹색조로 바뀌면서 하늘 없이 들판으로만 화면을 채웠다. 들녘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명력과,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풍경을 화면에 담은 것이다. 이런 구도가 서양식 원근법보다 훨씬 풍부하게 풍경을 담을 수 있었고, 91년 몬테카를로 회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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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드로잉을 많이 한다. 임직순 교수로부터 하루에 기본 20장씩은 하도록 지도를 받았고 지금도 수시로 드로잉을 하는데, 이를 통해 선의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드로잉을 화실에 왔던 쥬드폼므 관장이 유심히 보더니 파리 전시를 주선해줘서 유럽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89년부터 1년간 다녀 온 아메리칸 인디언 루트 여행은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계기가 됐다. 캐나다에서 페루까지 한 곳에서 1~3개월씩 머물렀다. 같은 몽골리안 계통인 그들에게서 문화적 공통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게 다 대등하다고 가족의 개념을 넓히게 되었다.

    필립 다장이 당신은 어디서 영향을 받았나?”하고 갑자기 물었다. 순간 떠오르는 대로 무등산 증심사의 오백나한이라고 대답했다. 6·25때 전소되고 오백전만 남아있었는데,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가끔 들러서 쉬면서 찢어진 창호지 사이로 들여다보면 출생지도 공부도 득도도 다 다른 분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대답한 것이지만 후에 생각해보니 정말 내가 추구하는 작품세계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이화여대에 다니던 딸아이 작업실에서 금속판이 작품의 재료로 괜찮을 듯 보였다. 거기에 뾰족한 것으로 두들겨 점점이 튀어나오게 한 것이 타출기법 드로잉 작업이다. 이걸로 벨기에와 생레미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기도 했다.

    공업용 실리콘의 흰색 띠에 유화로 채색을 해서 기호적인 형상모양대로 붙여 넣어 보았다. 과정이 아주 까다롭다. 실리콘에 색을 입히는 것도 그렇고, 탄력 때문에 굳기 전에 떨어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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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영성의 실리콘, 금속판, 스테인레스볼 작업 (부분)

    화가는 모든 것을 예술로 바꿀 수 있다.’는 전제로 작업한다. 안료도 원래 다른 용도로 만들어진 것을 화가들이 사용한 것이다. 화가는 늘 새로운 재료에 도전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검정색은 가장 화려하면서도 여러 색들이 혼합된 상태이고, 마치 못 다한 이야기와도 같다. “예술이란 결국 자신의 이야기이고, 만인이 처음 들어보는 인간의 이야기이어야 할 것이다.”라는 김환기 선생의 말씀에 공감한다.

    화가는 실패하더라도 도전해야 한다. 뉴욕전시 후에 다른 분들은 다들 귀국했어도 언어도 잘 안 통하는 상태에서 혼자 1년간 유럽여행을 했다. 그때 유럽에서 돌아오니 집에 빚이 2억이었다. 그러나 그때 뛰쳐나갔기 때문에 그나마 이렇게 올 수 있었다. 뭔가 다른 짓거리를 해야 한다.

    임직순 선생님이 인생의 멘토였던 셈이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에 처음 만나게 된 분이다. 그분을 조선대학교로 모시고 올 때 숙명여고에 재직 중이셨다. 국전에서 대통령상도 받고 그러실 때였지만 주변에 정리해야 할 것들이 있어 돈이 필요하다셨다. 그래서 진양욱 선생이 학교 공금을 갖고 찾아갔는데, 뒤에 말씀이 그때 진 선생이 팬티에 바느질해서 만든 속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놓더라는 말씀을 했다. 서울에 공금을 지니고 가면서 그 정도 부담이 컸었던 것이다. 광주로 내려오신 첫날 저녁에도 캔버스에 밑칠을 하고 계셨다. 스케치를 나가면 꼭 아침 일찍 일어나 작은 엽서에 그림을 그려 지인들에게 보내시곤 했다. 늘 부지런하고 주변 분들을 챙기셨다.

    디지털시대에 화가의 길은 우선 선택하기가 난제이다. 광주비엔날레는 학위 없는 박사과정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출품을 하건 안하건 보고 듣고 자극받으면서 많은 공부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내 주변에 관한 이야기들을 좀 더 많이 다루어 볼 생각이다. 기회가 되면 첫 개인전을 열었던 영산포에서 다시 한 번 전시를 해보고 싶다.

    - 대담/정리 조인호 (광주비엔날레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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