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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 아닌 초록 / 화가 조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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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백은하 작성일06-09-13 01:58 조회3,0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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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 아닌 초록

    화가 조근호의 작품세계

    백은하(소설가)


      오전 열시, 초록 나비 한 마리가 연보랏빛 라일락꽃잎 위에 앉아 있다. 나비가 원하는 것은 날개짓이다. 5월의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상승’이라는 詩에서 “혼미한 존재를 무겁게 짓누르는/ 권태와 거대한 슬픔을 뒤로 하고/ 창창히 빛나는 들판을 향해 힘찬 날개로/ 날아오르는 자 행복하리” 라고 노래했다.


      라일락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나비를 바라본다. 나비는 끊임없이 멈칫거린다. 라일락꽃과 능소화가 다른 점은 라일락꽃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쳐들고 5월의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코발트색 하늘과 연보랏빛 라일락꽃, 그리고 진한 꽃향기. 그래서 노래 속에 등장하는 라일락꽃은 명징한 추억의 한 장면을 갖고 기억속에 각인된다.


      초록 나비의 멈칫거림을 설레임을 안은 채 바라본다. 한 화가의 작업실에 갈 때마다 神聖에 反하는 자들의 몽상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한 소설가의 창작집을 펼 칠 때도 마찬가지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열 편의 단편소설을 읽고 나면, 한 사람을 읽은 기분. 지루함을 견뎌야만 못생긴 괴물이 버티고 서 있는 하나의 거대한 철문이 비로소 열려진다.


      조근호 작품의 초록톤에서는 詩的인 정적이 흐른다. 화가는 ‘고요’라고 말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의 형태란 色彩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2006년 조근호의 ‘하늘, 땅, 고요 展’에서 그의 화면이 도달한 적요한 초록톤 속에는 블랙, 화이트, 옐로우가 숨쉬고 있다. 화가의 호흡과 붓질의 시간이 만들어낸 블랙과 화이트와 옐로우가 혼합되어서 만들어진 새로운 초록이다.


      그는 대학시절 지도 교수님과 많은 대화를 한 후, 추상미술로 그림을 시작했다. 實像이 아닌 심상의 풍경을 표현해 내기 위해 많은 다양한 실험과 모색의 시간들을 보냈다. 그는 ‘20세기 미술 현상에 나타난 선의 연구’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91년 광주 인재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꾸준한 개인전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화면을 통해 보여주었다. 창평 광덕리 작업실 시절의 작품들은 97년 서울 덕원갤러리에서 열린 ‘인간과 자연 생명 展’에서 발표했다. 그 때, 다양한 혼합재료들로 ‘화가의 집’ ‘들바람’ ‘광덕리의 가을’ ‘바람이 부는 날’ 등이 발표된다. 당시의 작품들은 다양한 질감으로 표현되었다.


      긴 시간 캔버스 앞에 앉아있는 조근호의 시간은 흘러간다. 그는 작업실을 나서서 스케치 여행을 하면서 자연과 맞닥뜨린다. 담양호 호수 주변의 고요함과 봄이 오는 들녘의 아지랑이, 오솔길, 섬의 일출과 일몰, 도시의 밤풍경, 켜지는 승용차의 헤드라이트 불빛 등이 동양적인 禪과 접목되면서 아름다운 한 폭의 서정적인 공간이 탄생한다.  


      2003년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린 ‘하늘과 땅 그리고 정적展’에서 보여준 작품들은 조근호의 화면이 보들레르의 시에서 보여주는 상승에 이른 듯한 미학을 보여준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검정 단색으로 흐리게 표현되어 산 위에 기류의 흐름이 포착되고 하늘에는 구름이 있는 듯 없는 듯 미묘하게 처리된 화면의 ‘밤’ 연작이나 파스텔톤의 연두색, 하늘색, 핑크색, 주황색 등으로 단색으로 처리된 개개의 작품을 연작으로 그린 ‘들’, 브라운톤으로 도시의 밤풍경을 그린 ‘도시의 밤’ 연작 등 작품제작에서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지만 개개의 작품에서는 단색 또는 2, 3색 정도의 절제된 색을 사용한 화면처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절제된 색채는 우리 마음을 고요함 속 안식의 시간으로 깊숙이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갖는다.” 라고 말한다.


      화면의 질감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물감을 아주 얇게 처리했는데, 그 얇은 질감을 얻기 위해 그는 숱하게 많은 물감을 칠했다가 나이프로 긁어내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극도로 절제된 질감 안에는 역동하는 질감들이 숨어 있다.


      블랙톤의 ‘밤’ 연작들은 인식의 시간에 침잠해있다. 저 멀리 아련한 별빛 하나와 마을의 불빛이 보이다가, 이내 그 아련한 빛마저 사라지고 완전한 어둠이 100호 화면에 펼쳐진다. 밤풍경이다. 밤은 길게 흘러간다. 조근호의 새벽은 블루톤으로 열린다. 의외로 새벽달은 둥그런 형상을 갖고 있다. 서정적인 ‘조근호의 불루’다. 블랙톤의 ‘밤’을 지나, 블루톤의 ‘새벽달’을 지나, 초록톤의 ‘섬’의 일출과 ‘호수의 밤’이 열렸다. ‘호수의 밤’에는 별도 많고 산도 많다. 다정해졌다.


      ‘하늘, 땅, 고요 展’ 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안에는, 그가 다다르고자 하는 동양적인 禪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작품들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고요함 속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대기가 흐르는 소리가 있고, 살랑이는 바람결에 잔잔한 물결의 움직임과 수면 위에서 석양빛이 반짝인다.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무심한 자연 속에서 끌어낸 무아정적의 禪의 경지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 ‘호수의 밤’ 앞에 서면 호수의 물결이 품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관객에게 손을 내민다. 소란스럽지 않으면서 靜的인 밀어들이다. 작가는 호수의 물결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까?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고 돌아서는데 ‘초록이 아닌 초록’이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몇 분 후 FM라디오에서 수잔 잭스가 부르는 ‘에버그린’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조근호의 작품들은 동양적인 禪의 정밀한 고요에 다가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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