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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별이 반짝이는 시간 - 판화가 박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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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백은하 작성일09-05-04 18:53 조회3,7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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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별이 반짝이는 시간


    - 판화가 박선주의 작품 세계


    백은하 (소설가)


      빛나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다. 빛나는 세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다. 단단한 수정구슬 속에 꽁꽁 숨어 있는 예술의 세계는 우리에게는 어둠에 갖혀 있는 미지의 땅이다. 그래서 숨막히게 매혹적이고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그 완전한 세계의 속살을 단 한번이라도 만져보기 위해 청년 작가는 때로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 때로는 무릎을 꿇고 신 앞에 기원하면서 그 수정구슬을 향해 몸을 던진다. 때론 깨지고 때론 다친다. 예술이 잠들어 있는 수정구슬을 여는 열쇠는 제각각 다르다.


      그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밤벚꽃이 지고 있었다. 누군가와 손을 잡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마지막 지는 밤벚꽃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광주 서동에 있는 박선주의 작업실 문을 열었다. 30여평이 넘는 작업실은 단정하게 정리돼 있었고, 작업대 위에 신작이 놓여있었다. 크림색 소파에서 차를 한 잔 마신 후, 설레는 마음으로 신작 앞으로 다가갔다.


      박선주가 2009년에 발표하는 신작의 제목은 <정글>이다. ‘잉그레이빙’ 기법으로 여자의 머리카락을 한올한올 새겨넣은 그녀의 작품에서는 장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거의 두달이 소요된다는 그녀의 작품은 디지털 세계에 우리가 잃어가는 손맛과 디테일과 집중력을 갖고 있었다.


      박선주는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아카데믹한 엘리트 미술 교육을 받았다. 광주예고를 시작으로 조선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96년 동대학원 순수미술학과에서 <프리다 칼로 작품의 자아적 특성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10월 광주 <빛고을갤러리>에서 <박선주 판화전>이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Wood cut’과 ‘아쿠아틴트’ 판화 기법으로 <일상-주술적 해석> <No! 브라> <My! 브라> <분출> <마음속 깊은 곳의 나> <계절의 꽃> <사계>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첫 개인전을 마치고 새로운 작품 방향을 모색하던 그녀는 ‘크렌베리스’의 ‘Twenty one’을 들으면서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다. 스물 한살에 그녀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삶이 결코 라벤다향 같지는 않겠지만, 이토록 차갑고 독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때론 압생트 같은 독한 삶을 꿈꾸었겠지만, 스파클링 와인같은 달콤함도 있으리라 상상했을 것이다. 랭보는 이십대에 더 이상 詩를 쓰지 않고 사막을 걸었다. 랭보의 詩는 쓰여진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던져졌다. 그러나 그녀는 랭보같은 천재가 아니기에 밤이면 밀랍 양초를 켜고 작업대 앞에 앉아 ‘마름모꼴의 칼’을 들고 동판 위에 여인의 머리카락을 한올한올 새겨야했다. 코알라의 깃털도 하나하나 새겼다.


      그녀는 파리 5구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생활하면서 피카소, 달리 등이 작업을 했던 ‘17공방’과 ‘63공방’에서 판화를 공부하면서 ‘파리 아메리칸 아카데미’ 석사 과정에 입학한다. ‘파리 아메리칸 아카데미’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그녀의 예술 세계는 내적으로 성숙해간다. 그곳에서 ‘조엘 호슈’교수를 만나서 ‘뷰린’(Burin)기법을 사사받는다.


      2000년 봄 파리에 있는 ‘Academy Art Gallery-Pavillion Val De Grace’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뒤러論>으로 석사 학위를 받는다.

    그녀는 그 전시회에서 <Independent><Fear><My three perspicacity><Resting place><Non male!>등의 작품을 발표해서 극찬을 받는다. 그녀의 내부에서 터져 나오는 여성성의 외침과 자신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려는 진지함이 가득담긴 작품이었다. 그녀는 여성인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까지 깊숙이 들여다보려고 했다.

      <My three perspicacity>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도발적인 두 눈으로 카메라 앵글을 정면으로 바라보듯이 관객을 바라본다. 압생트같은 삶이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어도 묵묵하게 수정구슬을 향해 기꺼이 몸을 날릴 수 있는 여성의 눈동자다. 그녀는 3년간의 밀도있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되돌아와서 개인전을 연다.

      그리고 그녀는 결혼을 하고 30대를 보낸다. 결혼을 한 여성 작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그녀에게도 일어났다. 그녀는 밤이면 밀랍 양초를 켜고 작업대 앞에 앉았다.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하게 그 일상들을 견디면서 조각난 시간을 이어붙였다.


      햇빛 한점 들지 않는 사막을 걷는 심정으로 ‘마름모꼴의 칼’을 들고 동판을 새겼다. 작품 위에는 불안한 자아와 굳건하게 지켜내려는 그녀의 가정이 혼재돼 나타난다. 중첩되어지고 불안해보이는 기하학적인 공간 위에 박선주의 자화상처럼 보이는 나신의 여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자화상을 중심으로 코알라와 부엉이, 잠자리 그리고 각종 신비스러운 식물들이 뒤엉겨있다. 그곳은 그녀가 정주해있는 그녀의 가정이자 일상이다. 그러나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가족과 자화상이 함께 서 있는 그곳을 <정글>이라 말한다.

      꿈과 욕망, 현실과 이상이 뒤엉겨있다. 그녀는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 30대를 살았다. 때때로 기다렸다. ‘자미로콰이’의 ‘내 삶의 사진’(Picture of my life)처럼 어디에선가 자신의 미래의 삶이 새겨진 엽서가 그녀 앞에 당도하기를 기다리면서 밤마다 동판 위에 여성의 머리카락을 새겼다.


      “치료약이 있다면 제발 보내줘.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글이 적힌 내 삶의 사진과 함께 말야.”


      자미로콰이의 음악은 경쾌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삶의 사진은 처음부터 수정구슬 속에 있었다. 그 수정구슬의 열쇠를 찾기 위해 그녀의 30대의 심연은 그토록 깊고 길었던 것이다. 그날 밤 크림색 소파에 앉아서 위스키를 마시면서 나는 울었을까.


      아일랜드의 시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시를 그녀에게 선물한다.


    “아직 날지 말아요. 이제 때가 됐어요.

    평범한 빛의 눈동자를 멸시하는 한밤의 꽃송이처럼,

    달을 사랑하는 아가씨들과 밤의 아들들을 위해

    기쁨이 꽃을 피울 때가 됐어요.”


      더불어 “Fly! Fly!”라는 문장도. 수정구슬의 문이 언제 열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신작 <정글 시리즈>는 한단계 더 높은 세계로 진화했고, 더 넓은 세계를 향하고 있다. 한걸음 한걸음 침착하게 내딛다보면 언젠가 그녀의 어깨에서 날개가 싹터서 진정한 쥬이상스의 세계를 느끼면서, 그녀는 날아오를 것이다. 그녀의 날개는 퍼플(Purple), 보랏빛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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