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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크의 유혹 / 화가 박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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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백은하 작성일06-09-13 08:37 조회3,2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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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크의 유혹
                                                  화가 박수만의 작품세계
                                                                                                                       
                                                                                                                      백은하(소설가)


    박수만의 화면에는 사유하는 그로테스크 핑크빛 몸이 말을 건넨다. 몸은 사회와 소통하는 매개체로서 작용한다. 핑크라는 색채로 표현된 몸은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내고 있는 몸이다. 박수만의 그로테스크 핑크는 그가 의도적으로 채색했다기보다, 캔버스 위의 붓질속에서 시간이 이끌어낸 색채이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박수만에게 화가로서의 미술적 섬광이 다가온 날 말이다. 그는 미대 3학년이었다. ‘작가론’ 레포트를 쓰기 위해서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고 있었다. 도서관 창 밖에서는 빗소리가 점점 강해졌고, 청색 면티를 입은 여학생은 논문실 귀퉁이의 낡은 나무 책상에서 두꺼운 노트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에 관한 논문의 한 귀절을 노트에 옮겨 적고 있었다. 박수만은 ‘드 쿠닝’의 작품론을 쓰기 위해서 한 시간째 논문의 제목들을 읽어내려 갔지만 ‘드 쿠닝’ 에 관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었다. 서서히 다리도 아파오고 담배 생각도 났다.


      그가 자료찾기를 포기하려는 순간 한 편의 논문을 발견했다. ‘에곤쉴레’에 관한 논문이었다. 그 논문에서 그는 흑백도판의 에곤쉴레 작품을 처음 접했다. 그 때 온 몸에서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 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작품을 본 적이 없었다. 그토록 우울하고 그토록 그로테스크하면서 인간의 심연 바닥까지 추적해낸 작품은 처음이었다. 그 당시 전남대 도서관에는 에곤쉴레에 관한 논문은 단 한 편밖에 없었다고 한다. 몇 개월 뒤 계간미술에서 에곤쉴레 작품을 컬러도판으로 보게 되었고, 몇년 후 에곤쉴레의 원서와 화집들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코코슈카, 에곤쉴레, 뭉크 등의 표현주의 계열의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세상을 읽는 방법, 인체를 재해석하는 방법, 사회의 제도나 전쟁이 인체에 가하는 폭력에 관해 진지하게 사유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1차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 화가들은 허무적이면서도 아나키스트적인 색채가 배어있는 작품들을 많이 했는데, 인간에 대한 연민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가 대학을 다닐 때는 미술이 적극적으로 사회적인 발언을 할 시기였다. 그는 ‘형상미술’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인간중심의 미술, 인간이 주체가 되는 미술에 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김상연, 신창운 등과 ‘탈이미지’라는 그룹을 만들어서 실험적인 작업들을 하면서 진정으로 원하는 미술 세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모방과 탈피를 하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박수만은 89년 8월 광주 금호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유화 작업들로 첫 개인전을 열었고, 93년 서울 경인미술관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연다. 그는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기술, 느낌, 개성’ 을 꼽았다. 그 중에서 개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는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시켰다. 데뷔를 한  후 그는 화면 속에서 표현되는 ‘장식적인 요소’와 보다 ‘파인fine한 요소’ 사이에서 끊임없이 내적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그가 발표한 작품들에서 그의 내적갈등이 표면에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는 화면에 장식적인 장치를 끌어들이지 않고 표현주의적인 정조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어느 날 관람객들이 그의 작품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는 오랜시간 ‘황토화실’을 열면서 인체 드로잉을 해 왔다. 박수만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체는 왜곡되고 변형되고 기괴하지만, 비내리는 토요일 오후 그는 모델을 앞에 두고 연필로 사실적인 인체 드로잉을 했다. ‘변형과 사실’, ‘왜곡과 사실’이 공존하는 일상이었다.


      박수만은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의 예를 들었는데, 그는 자신에게 채워지지 않은 어떤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캔버스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작업을 한다. 현대 미술이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그는  “나도 평면을 좋아하고, 평면도 나를 사랑하고!”라는 말로 대신한다. 오브제를 이용한 작품을 하더라도 결국 ‘그리는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화가 박수만이 에곤쉴레를 만난것처럼 운명적으로 핑크를 만난 시점도 그는 확연하게 기억한다. 2003년 신세계미술제 대상을 받은 작품들에는 흰색과 핑크가 혼재해서 나타난다. ‘관계’ ‘대화’ ‘사회’에는 청색바탕에 화이트 계열의 인체가 등장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 ‘휴식’ ‘가면’ 등에는 핑크 계열의 인체가 등장한다. 


      청색 바탕은 자본주의 사회를 상징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의 질서에 편입하려는 자아는 끊임없이 훼손되고 많은 가면을 요구받는다. ‘가면’ 이라는 작품은 몸은 하나인데 얼굴은 셋이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서 많은 가면을 써야만 삶이 유지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회’는 보다 직접적으로 나무 상자를  통과해서 사회적 질서로 편입한 화이트 계열의 인간 군상들이 등장한다. ‘살아가는 것’에는 현대 산업 사회 속의 인간들은 줄타기를 하고 있는 광대들처럼 위태롭게 표현되고 있다. 


      2006년 광주롯데화랑 창작지원전으로 열린 ‘미인도’ 전에는 보다 선명한 색채의 핑크가 등장한다. 핑크라는 색깔이 가진 장식적인 달콤함을 유쾌하게 배반하면서 명쾌해졌다. 레이스가 상상되는 진짜 핑크다. ‘수심’이라는 작품에서는 핑크와 그린의 색채대비가 선명하고 ‘내면’이라는 작품에서는 핑크와 블랙의 대비가 선명하다, 박수만의 색채들이 명랑함에 도달했다. ‘먹다’ ‘앉다-생각하다’ 라는 작품 속의 인간 군상들의 삶은 지금도 끊임없이 현실적인 문제로  부대끼고 있지만 그들은 자아와의 소통에 결국은 성공했고 좌절하지 않았다.


      ‘수심’ 과 ‘내면’에는 인간의 ‘손’과 ‘손가락’ 이 등장한다. 열개의 손가락은 수심에 가득차있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손가락들은 끝까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지켜가면서 자아와의 소통에 성공해서 결코 분열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어느날 박수만의 화면 속 손가락들이 미소짓고 있을 수도 있다. 박수만의 핑크는 여전히 그로테스크 하겠지만 위트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또 다른 미술적 섬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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