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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의작가들/회화

    오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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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소개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목인 서양화가 오지호는 1905년 전남 화순 출생으로 전주고보를 거쳐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미술학원 1년 수업 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를 졸업(1926~1931)하였다.

    재학 중 김주경 등과 민족미술단체인 녹향회’(綠鄕會)를 결성하였고, 1935년부터 10여 년간 개성 송도고보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다. 밝고 생기 넘치는 색채와 활달한 붓놀림으로 프랑스 인상주의와 일본 외광파 화법을 한국의 미감과 정서에 맞게 재창조한 구상회화를 탐구하면서 1938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을 출판하여 한국미술계에서는 최초인 원색도판들과 함께 순수회화론을 발표하였다. 해방공간에서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미술동맹등에 참여하다 귀향하여 1948광주미술연구회를 결성하였으며 1949년 조선대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한국전쟁기에 입산활동으로 고초를 겪고 난 뒤 1953년 초겨울 광주 지산동 초가에 정착하고 조선대에 복직(~1960)하였으며, 1955년 양식목조 화실을 지어 창작의 산실로 삼았다. 1961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준비위원과 전남총위원회 대표로 활동한 것이 빌미가 되어 516군사정변 때 구속되어 1년여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창작활동과 함께 1969한국어문교육연구회창립 등 국한문병행교육운동과 문화재보호운동 등 민족정기,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바로 세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1948년 광주금융조합에서 첫 개인전 이후 1963(광주 길다방), 1965(전주 금란다방, 목포 밀물다방), 1966(여수 아카데미다방), 1967~1969(매년, 광주 Y살롱), 1970(서울 신문회관), 1973(서울 현대화랑) 개인전을 가졌고, 1985(서울 국립현대미술관)2003(국립광주박물관) 등 회고전이 열렸다.

    1956[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초대작가로 지정된 뒤 이후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하였고, 1965년 지방 첫 관전인 [전라남도미술전람회](전남도전)를 창설하여 작가 등용문과 입지토대의 기틀을 다졌다.

    1930년대부터 회화론과 구상회화, 국한문병행교육에 관한 수많은 글을 발표하였으며, 저서로 현대회화의 근본문제(1968),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1971), 알파벳문명의 종언(1979), 미와 회화의 과학(1992)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화훈장 모란장(1973), 대한민국예술원상(1977)을 수상하였고, 1982년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78세로 타계하였으며, 대한민국금관문화훈장(2002)이 추서되었다



    작가의 작품세계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요,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태양의 광과 열에 의하여 길러진다... 회화는 인류가 태양에게 보내는 찬가다.... 회화는 환희의 예술이다.”

    - 오지호,순수회화론,오지호 김주경 이인화집(1938)에서

     

    조선 사람은 예로부터 명랑하고 선명한 색채를 좋아하고 요구한다새로운 미술은 이와 같은 조선인의 생리적 감각과 감정적 요구에 적응할 것을 제일 요건으로 해야 할 것이다민족미술이란 본질상 국민예술인 것이다. 국민의 생활감정을 반영하고 그들의 생활의욕을 앙양하는 예술, 즉 국민의 벗이라야 할 것이다.”

    - 오지호, 해방이후 미술 총평, 경향신문(1946.12.05.)에서

     

    오지호는 자신의 예술과 사상을 온전히 펴지 못하였다. 분단과 비민주적 사회여건 아래라는 시대적 한계뿐만 아니라, 그 회화 이념에도 모순이 없지 않다. 민족주의를 지향했던 오지호 자신도 사회적 실천의 진보성에 비하여, 화가로서 회화 자체의 순수성만을 고집한 점이 남는다. 작품활동과 정치적 실천관계를 통합시키지 못한 민족미술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초기 한국현대회화사에서 오지호가 차지하는 위치는 당대의 누구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서구 인상주의를 체득하여 대담한 터치의 화사한 색채감으로 한국의 자연과 풍광을 신명나게 녹여내면서, 한국적 구상화풍의 한 거목으로 자신의 개성적 회화세계를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제잔재 청산과 조선적 색채에 기반한 민족미술의 창조, 그리고 사회적 실천으로 그처럼 시대적 성과와 긍지를 뚜렷이 보여주는 경우가 드물기에 오지호의 인생역정은 아름답게 빛을 발한다.”

    - 이태호(미술사가, 명지대 교수), 오지호의 예술과 사상, 빛을 그린 화가 오지호전시도록(국립광주박물관부국문화재단, 2003)에서 발췌

     

    오지호는 자신의 독자적인 감성과 기질로 한국적 인상주의를 확립시킨 화가였다. 그는 조선의 맑고 깨끗한 공기와 자연에서 조선회화의 정체성을 찾았다오지호의 풍경은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확산되는 빛과 신선하면서도 순수한 색채를 통해 표현했다는 점에서 당시 다른 서양화가들의 풍경화와 달랐다이제까지 자연을 지성적으로 이해했던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벗어나 경이롭고 생기가 넘치며, 누구나 쉽게 향유할 수 있는 순수한 조선의 자연을 담았고, 근대 풍경화의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한 화가로 자리 잡았다.”

    - 김영나(서울대 명예교수), 회화는 빛의 예술 ; 오지호의 풍경화, 오지호의 삶과 화업(광주문화재단, 2020)에서 발췌 



    연락처

    광주시 동구 지호로 81-20 (지산동 275) 

    오지호 <잔설>, 1926, 캔버스에 유채, 37.5x45.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잔설>, 1926, 캔버스에 유채, 37.5x45.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lt;시골소녀&gt;, 1929, 캔버스에 유채, 45x38cm
    오지호 <시골소녀>, 1929, 캔버스에 유채, 45x38cm

    오지호 <도원풍경>, 1937, 캔버스에 유채, 50x60.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도원풍경>, 1937, 캔버스에 유채, 50x60.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lt;남향집&gt;, 1939, 캔버스에 유채, 80×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남향집>, 1939, 캔버스에 유채, 80×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무등산이 보이는 광주천변>, 1969, 캔버스에 유화, 60x72.5cm
    오지호 <무등산이 보이는 광주천변>, 1969, 캔버스에 유화, 60x72.5cm

    오지호 &lt;과수원 풍경&gt;,1972, 캔버스에 유화, 41x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과수원 풍경>,1972, 캔버스에 유화, 41x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항구>, 1972, 캔버스에 유채, 37x45cm
    오지호 <항구>, 1972, 캔버스에 유채, 37x45cm

    오지호 &lt;북구의 전원&gt;, 1976, 캔버스에 유채, 53.5x4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북구의 전원>, 1976, 캔버스에 유채, 53.5x41.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lt;청산&gt;, 1979, 캔버스에 유화, 41x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 <청산>, 1979, 캔버스에 유화, 41x5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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