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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의작가들/회화

    강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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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소개

    강용운 화백은 1921년 화순 태생으로 서울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뒤 193918세 때 동경제국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하여 가와구찌 가가이(天口軌外) 교수 등으로부터 현대 조형세계를 익혔다. 1944년 3년 수료로 졸업은 못하고 귀국하여 ‘47년부터 전남여고와 광주사범학교를 거쳐 1955년부터 1987년까지 광주사범대학과 광주교육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40년대 초부터 과감한 단순변형과 자유로운 형식으로 주제의 이미지를 함축시켜낸 원색조 화면으로 비정형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19504월 첫 개인전(광주 미국공보원)에서 절반 이상의 반추상 작품을 전시하였고, 58년부터 ’69년까지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초대전]에 참여하였다. 오지호의 구상회화론에 맞서 바로 다음 달인 19602월에 같은 전남일보 지면을 통해 현대회화론-그 사조의 의미와 금일의 예술을 연재하여 비구상 지상논쟁을 펼쳤다. 1962[전남미술가협회] 창립에 나서 제1,2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첫 전시 이후 1954(광주 미국문화원), 1957(광주 Y살롱), 1965(광주관광호텔 화랑), 1971(광주Y살롱), 1983(강용운 회화 40년전, 광주 남도예술회관), 1988(정년퇴임 기념전, 광주 화니미술관), 1999(강용운회화 60년전, 광주시립미술관) 등의 개인전을 가졌다.

    단체전으로는 제8大潮會(1942 동경, 특선), 새교육전람회(1947, 중앙초등학교 강당), 강용운·김인규·양수아 3인전(1955),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1958~69), 전일작가초대전(1972), 1회 지방작가초대전(1974, 서울 미술회관), 한국현대미술 20년의 동향(1978, 국립현대미술관), 원로작가초대전(1992,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작가순회전(1993, 파리·서울·도쿄·뉴욕), 한국의 추상미술(1994, 서남미술관), 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1995, 비엔날레전시관), 광주시미술대전 초대작가전(1995, 광주 라인미술관), 한국화랑미술제(1996, 서울 예술의 전당), 남도정신의 원류를 찾아서(1998, 광주 신세계갤러리), 격동기의 미술혼(1999, 부산시립미술관), 현대회화의 거장들(2001, 신세계갤러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전(2012, 과천) 등의 전시에 참여하였다. 20061월 숙환으로 86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작가의 작품세계

    총천연색 사진, 입체사진까지 있는 시대에 사물의 외관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구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 자연의 모방인 아카데미즘은 태양이나 전등 앞의 호롱불처럼 무가치한 것.. 이 세계와 우주의 모든 것에서 에너지를 발견하여 모든 인간행위의 제활동으로 얻어낸 에센스를 종합하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여야 한다... 앵포르멜은 현실의 벽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며 인간역사, 예술의 역사는 반전통적이며 본질은 항상 부정적인 것이다... 가치 있는 예술은 생명의 구토이다

    - 강용운. ‘현대회화론-그 사조의 의미와 금일의 예술(전남일보. 1961.2.11.3.1, 21회 연재)

     

    예술이란 자기 내부의 심층을 파헤쳐 현실의 火荊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이다. 악마의 영혼이건 천사의 영혼이건 昇華의 순간은 莊嚴하며 아름다운 것이다.”(1999년 개인전 도록 작가의 글)

    강용운 화백의 회화세계는 주관적 내면 감정의 표출을 위주로 한 즉흥과 파격, 자유롭고 거친 붓놀림과 안료나 바닥재의 표현효과로 나타나는 오묘한 화면들을 즐기며, 평생을 비정형 회화로 일관하였다. 1940년대 초부터 나타나는 강화백의 회화적 시도와 표현형식의 확장은 당대 지역화단은 물론 서울 쪽에서도 보기 드문 대담한 형식실험이자 새 시대 새 미술에 대한 적극적 독자탐구였음에 틀림없다. 강화백은 합리주의(合理主義)거나, 비합리주의(非合理主義)거나 낡고 답습적인 것보다 새로운 현실을 창조(創造)함이 가치 있는 표현활동이라는 쪽이었다. 예술이란 과거의 답습에서 벗어나 시대감각에 맞춰 자기세계로 이끄는 전위이어야 한다고 했다. 작가로서 창조적인 자세와, 정신적 뿌리로서 동양성(東洋性)’, 형식면에서는 일탈과 자유를 향한 비정형(非定形)’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것 같다. 강화백은 스스로 시대(時代)를 실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자신의 평생 화업을 3기로 구분하였다. , 1기는 ()의 폭발’, 2기는 동양철학의 회색(灰色)’, 3기는 청명(淸明)한 풀비의 일획선(一劃線)’으로 시기별 묶음을 나누었다.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 실험과 창작자로서 자유의지 활동은 중앙화단이나 주류와는 멀어지게 되었지만 강화백의 비정형비구상 미술을 수혈 받은 광주사범학교광주사범대학 제자들이 광주지역 추상화단을 일구어 갔고, 1980년 후반 시대변화의 격랑 속에서 청년세대의 일탈적 해체추상으로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다.

    - 조인호 ([소나무] 20138월호 현실의 火荊으로 시대를 실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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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용운|봄|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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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용운|부활|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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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용운|원야|1965|
    강용운_원야_1965_

    강용운|무등의 맥|1983|
    강용운_무등의 맥_1983_

    강용운 <무제>, 1999, 도기화
    강용운 <무제>, 1999, 도기화

    강용운, &lt;맥 2&gt;, 1986, 캔버스에 유채
    강용운, <맥 2>, 1986, 캔버스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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