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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의작가들/회화

    양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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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소개
    호남 추상화단의 선도자였던 양수아는 1920년 전남 보성 겸백 출생으로 보통학교 때 일본인 교장의 추천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1942년 동경 가와바다畵學校 洋畵科를 졸업하였다.

    1953년부터 `72년까지 목포․광주․서울․여수 등지에서 24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3회의 회고전(`87 현산미술관, `95 광주 무등일보 갤러리, `04 광주시립미술관)이 있었다.

    단체전으로는 [신창생파전](1940, 동경 銀座菊屋갤러리) [白漁會展](1941, 銀座菊屋) [조선일보 현대작가초대전](`58~69) 등에 출품하였고, [전남도전] 심사위원, 한국미협 전남지부장, 한국미술교육연구회 전남지부장 등을 지냈다. 만주일보사 신문기자(만주 안동, `43~45), 6.25때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목포사범학교, 문태중학교, 목포여자중학교, 광주사범학교 미술교사를 지냈다.

    `53년에 ‘목포양화연구소’, `61년부터는 광주에서 ‘양수아 화실’을 열어 교단 밖에서도 후학 양성에도 각별한 열의를 다하였고, 전라남도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72년 급성간경화로 타계하였다.



    작가의 작품세계
     

    ...고난의 시대에 태어나 질곡의 삶을 살았던 그는 해방공간(1945-49)의 혼돈을 견뎌내야 했다. 6.25동족상잔의 깊은 상처를 입고 끝 모르는 소외와 가난에 더하여 정신적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또한 한 시대의 지성으로 한국전의 와중에서 빨치산에 몸을 실었던 불운한 참여주의자이자, 24회의 전시회를 통해 자신의 화혼(畵魂)을 불사른 전업작가이자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다.

    … (중략)

    국전을 외면한 지방작가, 인기와 타협하지 못하는 반골, 제도권 밖의 그가 중앙화단에서 바로 평가를 받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앙 중심의 한국미술사 기술(記述)이 그의 미술사적 위상, 추상미술에서의 선구적 위치, 그리고 그가 호남 미술계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합당한 관심을 두지 못한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양수아의 정신세계는 마치 번질거리는 드넓은 새벽바다의 일렁임을 상기케 한다. 태양은 아직 구름 뒤에 숨어 있지만 그것이 다시 구름 위로 붉게 떠오르는 때면, 바다는 붉다가 노랗다가 백금처럼 하얗게 다시 변하는 천의 얼굴이 된다.

    그는 현실에서 지고 예술에서 되살아났다


    - 이석우 <예술낭인(浪人) 양수아-역사의 상흔조차 잠재울 수 없었던 예술투혼> 《격동기의 초상-양수아 꿈과 좌절》(`05, 광주시립미술관․부국문화재단)에서 발췌



    ‘그는 사실성, 감동과 함께 현대적 조형형식을 중요시 여겼다. 따라서 구상작품과 함께 거친 붓질에 원색조의 야수파계열 또는 입체파식 단순변형과 분할형태, 거친 필법 등의 반추상을 병행하였다. `53년 목포에서 첫 발표전이 있었지만 광주시절인 `56년 이후부터 더욱 비구상형식으로 변모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비정형 추상회화세계는 내적 기질이나 성향에서 강용운과는 또 다른 면을 보여 준다. 그 역시 현대미술의 새롭고 개성적인 표현양식을 추구하였으되 󰡐현실에서 자유로 된다는 것은 가장 현실의 필연성을 통찰한 위에서󰡑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설령 그의 천성이 󰡐철저한 자유주의자요 낭만주의자󰡑(이태)였을지라도 한국전쟁 때 남부군 정치부 대원으로 활동한 전력 때문에 휴전 이후 굴절되어버린 삶의 무게와 깊은 앙금이 쌓여 침묵 속의 뜨거운 격정으로 차오르게 되었다.


    󰡐위조지폐 구상화보다는 비구상화가 내 명함󰡑이라며 비정형의 추상으로 일관하였을지라도 그 바탕은 단지 현대성이나 조형형식의 자유로운 확장과 파격을 탐구하였다기보다는 순수열정과 고뇌 갈등들이 뒤엉키고 응축된 무언의 외침이자 내적 발언의 형식이었던 것이다. 24차례의 개인전을 치르면서 `60년대 󰡐백색에의 향수󰡑시기를 지나 <잉태>(`69), 한지를 이용한 <작품>(`70˜`72) 연작, <전화(戰禍)>(`72) 등 말년에 이를수록 속도감과 역동성이 더 강해진다. 그러나 끝내는 <상처 입은 자화상>(`69), <작품>(`72) 등 일련의 암울하고 일그러진 자전적 내면초상들을 거듭하다가 끝내 󰡐역사의 격랑 속에서 낭만적 예술참여주의자󰡑(이석우)로써 생의 바다에 침몰하고 말았다’.


    - 조인호 《남도미술의 숨결》(2003, 다지리)에서 발췌



    연락처
     

    광주광역시 동구 궁동 62-3  나인갤러리 양승찬 관장

    062-232-2328  /  016-625-5695

    양수아|작품|1962|
    양수아_작품_1962_

    양수아|작품|1960년대말|
    양수아_작품_1960년대말_

    양수아|성처입은 자화상|1970|
    양수아_성처입은 자화상_1970_

    양수아|작품|1970|
    양수아_작품_1970_

    양수아|작품|1971|
    양수아_작품_1971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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