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방원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약력소개 호남 근·현대 남화의 전통화맥을 이은 아산 조방원은 1926년 전남 무안 출생으로, 1945년 남농 허건 문하에서 그림을 시작했다. 1957년 목포 청호다방에서 첫 전시회를 시작으로 1973(목포 밀물다방), 1974(서울 신문회관), 1975(광주 전일화랑), 1976(서울 미도파화랑, 대구 태백화랑), 1977(부산 원화랑), 1978(부산 현대화랑), 1979(서울 세종문화회관), 1981(광주 현대화랑), 1982(서울 롯데미술관), 1987(광주 수련다방), 1994(광주 전일문화관), 1997(광주 광은갤러리), 2000(광주시립미술관), 2003(광주 남도예술회관), 2004(광주시립미술관), 2005(의재미술관), 2006(서울 공평아트센터) 등의 개인전을 가졌고, 사후인 2017년 [아산 조방원전](광주시립미술관), 2020년 [사유하며 산책하며](곡성 전남도립 아산조방원미술관) 등이 있었다. 기획전 단체전에는 [현대근대미술60년전](1972,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한국현역작가100인전](1973,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한국현대동양화대전](1976,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현대한국화협회전](1981~97, 세종문화회관, 동덕미술관, 광주 금호문화회관, 잠실미술관, 운현궁미술관 등),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1986,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한국현대미술초대전](1987,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묵노회 창립전](1987, 광주 남도예술회관), [동서양화 20인 초대전](1988, 광주 남봉미술관), [제1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문인화와 동양정신](1995, 광주 비엔날레전시관), [호남남화전](1997, 광주 조흥문화관), [대한민국원로작가초대전](1998, 서울시립미술관), [한국근대미술-근대를보는눈](1998, 국립광주박물관), [남도미술100년전](2006, 광주시립미술관), [탐매](2009, 국립광주박물관), [남도묵향 내일을 가다](2011, 광주시립미술관), [원로작가초대전](2011, KBS광주방송총국) 등에 초대되었고, 사후에도 [남도미술의 뿌리](2019, 광주시립미술관), [이건희컬렉션전](2019, 국립현대미술관), [남도수묵회전](2020, 광주 금호갤러리), [신소장품전](2021, 광주시립미술관) 등에 전시되었다. [제4회 국전] 문교부장관상(1955), [제5회~7회 국전] 3회 연속 특선으로 추천작가, 1962년에는 초대작가로 지정되었고, 1963년부터 77년까지 심사위원이었다. 이와 함께 [전남도전], [전매미술대상전], [대한민국미술대전], [동아미술제] 등의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국악 진흥을 위한 남도국악원을 건립(1968)하였고, 전남대학교 미술교육학과에 출강하였으며, 담양 남면 지실마을에 제자양성을 위한 화숙으로 묵노헌(墨奴軒, 1978)을 운영하였다. 아산미술문화재단 설립(1988)과 평생 수집한 간찰과 고서화 등 소장품 7,000여점을 전라남도에 기증하여 1996년 전남도립옥과미술관 개관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전라남도문화상(1958), 제4회 대웅상(1977, 전남매일신문사), 무등문화상(1991, 광주일보사), 성옥미술상(1992, 성옥문화재단), 보관문화훈장(1998), 허백련미술상(2004) 등을 수상하였다. 곡성군 죽곡면 연화리에서 노년의 화도를 닦다 2014년 5월 향년 89세로 타계하였다. 작가의 작품세계 “언제부터인가 우리 화단에도 사도(邪道)를 가지고 정도(正道)라 우기고 백주에 백귀(百鬼)가 날뛰고, 괴이한 짓만 하면서 독창이네 창조네 떠들며 관자(觀子)의 눈을 가리고 인간을 기만한다.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들이 기본을 공부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정도 사도도 구분 못한다… 글씨나 그림의 맑고 높은 경지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작가의 인품을 중히 여긴다… 요컨대 눈을 천지를 담을 수 있지만 티끌 하나가 능히 그 밝음을 잃게 한다. 마음은 태허를 포함하지만 한 생각이 능히 그 광대함을 가로 막는다. 이로써 한 생각이 곧 생사의 뿌리이고 재앙의 근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은 마음이 움직이는 미세한 기미를 알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 조방원의 권면사 중 (『아산 조방원』, 2003, 사회문화원) “한국화는 우리의 전통을 바닥에 깔고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한다. 서양적인 것의 수용도 우리 것을 기초로 해야 한다. 전통적인 우리의 기초를 닦지 않고 효과 위주의 그림만을 그린다거나 새로운 것만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데생실력 없이 피카소의 그림을 그리려 한다거나 추상화는 데생실력 없이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전통적 근본기법을 닦은 뒤에 왕성한 실험정신이 바람직하다. 난초로 운필을 배우고, 대로 필력을, 매화로 구도를, 국화로 먹 색깔을 체득한 뒤에 돌을 그리고 산수화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뼈대를 어느 정도 구현해내느냐가 화격을 좌우한다. 그림에 뼈대가 없으면 마네킹이나 조화처럼 혼이나 기가 깃들지 못한다.” - 조방원 회고 기사 중(동아일보, 2014.7.8) “아산(雅山) 화백의 큰 그릇 속에는 이 세상 오만가지 잡다한 것들이 다 들어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불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는 지나칠 정도로 흑백론리가 철저하고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와 가깝게 사귀기가 무척 까다롭다. 그러나 일단 그와 가까와지면 큰 그릇 속에서의 .평온함과 가장 인간적인 뜨거운 溫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는 그림 속에 집 한 간을 그려 넣을 때도 풍수지리를 따지고 동양화의 법리에 철저한 논리를 넘어선 동양적 사고의 이행자이다. 풍부한 설화와 우리 자연에 대한 깊은 미의식으로 하여 그의 먹그림은 유현미를 촉발시켜 준다. 그렇다고 그의 탈속함이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역사의 아픔을 사랑하듯이, 그의 이상은 언제나 현실 깊이 뿌리박고 있다. 일필일사(一筆一事)의 간결한 필치로 그려진 조방대담(粗放大膽)한 그의 수묵화는 선미(禪味)와 문기(文氣)를 한결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아산 화백의 먹색은 노장(老莊)의 허무(虛無)가 아닌. 선종(禪宗)의 무념명상(無念瞑想) 사상과 통한다. 선(禪)과 화(畵)의 관계를 그 양자가 기운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 문순태, 1982년 개인전 (롯데미술관) 도록 글에서 발췌 연락처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637-2 아산문화재단 061-363-7278~9 조방원 <귀동(歸童)>, 1978, 한지에 수묵담채, 300X218cm조방원 <매화동(梅花洞)>, 1980년대, 한지에 수묵담채, 57.5x81.1cm조방원 <농가한일(農家閑日)>, 1985, 한지에 수묵담채, 142x211cm조방원 <한산(寒山)>, 1980~2000년대, 한지에 수묵담채, 43x55.8cm조방원 <재기차기>, 1980~2000년대, 한지에 수묵담채, 57x38cm조방원 <우후(雨後)>, 1993, 한지에 수묵조방원 <산>, 1990년대, 한지에 수묵, 45.8x66.4cm조방원 <산정일장(山頂一長)>, 1990년대, 한지에 수묵담채, 55.6x142.8cm조방원 <고사관폭도(高士觀瀑圖)>, 2000, 한지에 수묵담채, 57x142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