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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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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소개
     

    대표적인 오월화가로 알려진 홍성담은 1955년 전남 신안출생으로 조선대학교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1979년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를 결성하여 80년대 민족민중미술운동의 새벽을 열었으며, 1980년 5ㆍ18광주민중항쟁 당시 문화선전대로 현장활동을 폈다. 1981년  소극장 <일과놀이> 활동, 1983년 광주시민미술학교 개설, 1985년 시각매체연구소ㆍ민족미술협의회 결성 참여, 1987년 6월항쟁 당시 문화선전 활동,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결성, 1988년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결성 준비위원회 참여, 광주문화운동협의회 운영위원장 및 민족민중미술운동전국연합 의장 등 80년대 현실참여 현장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1989년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제작 유포죄로 구속되어 1992년 출소하였는데, 1990년에는 영국 글래스고시의 '올해의 양심수 예술인', 엠네스더의 '1990년 제3세계의 탄압받는 3대 예술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개인전으로는 1980(광주 전일미술관), 1988(독일, HENKE 갤러리), 1989(마산 YMCA, 서울 그림마당 민, 전주 온다라미술관, 목포 카톨릭회관), 1990(홍성담 판화전, 영국 글래스고 미첼도서관, 트램웨이지 지하철역, 미국 LA, 독일HAMBURG재단 등), 1991년  홍성담 석방 촉구 판화전(독일 브레멘빌라이혼 화랑), 1999(탈옥, 서울 가나아트센터) , 2004년(가화假花, 서울 학고재), 2009년(야스쿠니의 迷妄, 서울 평화공간), 2010년(흰빛 검은 물, 광주 상록전시관) 등의 전시회를 가졌다.


    단체전은 5월 진혼제를 위한 야외전(1980, 나주 남평읍 드들강변), 2000년전(1981, 광주 전일미술관), 5월 판화전(1981, 전주 온다라미술관) 해방40년 역사전(1984, 서울ㆍ광주ㆍ대구ㆍ전주), 민족해방운동사 전국순회전(1989), 판화정예작가 15인 초대전(1995, 광주 송원갤러리), 통일전(1987, 서울 그림마당 민), 반고문전(1987, 광주 카톨릭센터), 시대정신전, 삶의 미술전, 동학 100주년 기념전(1994, 서울 예술의 전당), 물 한방울, 흙 한줌(1994, 서울ㆍ광주ㆍ부산), 제1회 광주비엔날레(1995, 광주비엔날레관), 한국정치법이 아로새긴 자유의목판화(LA 시티컬리지학생회관), 미술로 본 20세기 한국인물전-전태일(1996, 노화랑), 제8회 조국의 산하-강전(1996, 서울시립미술관), 시와 판화의 만남전(1998, 학고재화랑), 인권기념미술전(1998, 예술의전당 전시실), 친일인명사전 편찬기금 조성을 위한 판화전(2002,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 동쪽의 물결전-저항과 명상(2003, 뉴욕 퀸스미술관), 2004미디어아트비엔날레(2004, 서울시립미술관), 제6회 광주비엔날레(2006, 광주비엔날레관) 등의 전시에 참여하였다.

     

    작가의 작품세계
     

    우리시대 리얼리스트의 바람찬 삶 ...


    홍성담은 흉흉한 전설을 듣고 자랐는데 철들고 나서 알고보니 그게 모두 섬사람들이 겪은 무서운 사건들을 각색해 놓은 것이었다고 한다. 홍성담의 역사의식은 바로 그곳으로부터 시작한다. 홍성담이 대학시절 시작했던 연작 그림「백의민족의 노래」의 터전이 고향 사람들의 발자취였음을 필자는 훨씬 뒷날 깨달았다. 그 그림은 1980년 광주항쟁을 겪은 뒤 작품세계와 달랐고 그래서 그 뒤 잊어버렸던 것이다.

    홍성담은 유신과 신군부가 지배하는 땅에 리얼리즘 미학을 굳건하게 심어놓았다. 또 그는 조국의 운명을 위해 청춘을 바친 투사요 미술운동을 이끈 지장 (智將)임에 틀림이 없다. 일찍이 젊은 날의 홍성담이 '전투적 신명'을 미술운동의 화두로 내세웠을 땐 같은 진영 안에서조차 과격하다고 했던 또 뒷날 마르크스주의 미학을 내세운 이론가들은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비판을 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 홍성담의 그 화두는 대단히 철학적이고 진지하며 아름다움을 힘차게 일궈내는 미학적 알맹이를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해야 마땅한 상황에 이르렀다. 미술의 힘을 그처럼 적절하게 표현한 예를 필자는 아직 알지 못한다. 홍성담은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어왔다. 농촌·공장·가두·화랑으로 몸을 놀렸고 그때마다 홍성담은 어김없이 뛰어난 작품들을 내놓았다. 언술로서의 화두만 내놓은 게 아니라 창작이라고 하는 형상으로서의 화두를 내놓은 것이다.


    - 최  열 (미술평론가)



    역동성을 지닌 시민사회의 화가 


    그에 의하면 "하나의 양식은 예술적 실천 속에서 역동적으로 새로워지고 또 그 의미를 획득해 나가게 된다. 지난 양식의 제반 성과들이란 끊임없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양식으로 변화되 나가는 것이다. 양식의 변천과정은 대중력과 함께 하는 지속적인 예술 실천 과정의 움직이는 과정이다." 그의 말처럼 80년대 그의 그림들은 80년대 미술 과정 중에서 생산되고 있는 민족자주 형식의 한 양식을 대변한다. 미술운동을 사실주의 미술을 실천하는 과정으로 파악한 그는 대중력과 함께하면서 움직이는 민족민중 양식의 미학을 당대 시각저서의 조직화로 성취하고자 했다.

     80년대 홍성담의 작업들이 지닌 미학체계는 80년대 이루었던 민족민중문화운동의 성과들을 종합하는 것이었다. 이 성과는 한국사회의 현단계 성격에 대한 민족적 자아의 자각된 인식에서 비롯한 성과이다. 7.80년대 들어 본격화되던 민주화 운동과 문화운동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최근 근·현대사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의 요구는 한국의 현실문화에 대한 총체적 상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은 시민계층의 성장과 더불어 우리문화에 대한 현실인식에서 비판적 리얼리즘 미학의 의 성립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조건이 되었으며, 모더니즘 미학의 진보적 성과를 우리문화의 역사과정 속에서 재음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광주의 5월은 현실에 대한 전투적 리얼리즘의 자세를 촉구할 만큼 우리사회의 '현대성' 뒤에 은폐되어 있는 극명한 정치적 모순들을 노출시켰다. 작가 홍성담은 80년대 이 현실에 개입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진보적 지식인 예술가들의 전형적인 상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민중미술운동 이념이 추구했던 바 그 정치성의 미학의 가장 극명한 형식, 즉 민족적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80년대를 위한 '산 미술'을 담아냈던 것이다.


    - 강성원 (미술평론가)


     



    연락처


    011-280-6134

     

    홍성담|가자-도청으로|1986|
    홍성담_가자-도청으로_1986_

    홍성담|물 속에서 스무날|1999|
    홍성담_물 속에서 스무날_1999_

    홍성담|바리데기|1988|
    홍성담_바리데기_1988_

    홍성담|신몽유도원도|2002|
    홍성담_신몽유도원도_2002_

    홍성담|아리랑을 부르는 탁경현|2010|
    홍성담_아리랑을 부르는 탁경현_2010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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