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공감을 넘어 체감으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15-04-07 19:48 조회3,689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본문 문화, 공감을 넘어 체감(體感)으로 마주 보고 누워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정성스레 쓰다듬는 할아버지, 아흔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할머니의 살이 닿아야만 잠이 든다는 할아버지의 애틋함, 그리고 그 깊은 눈빛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 국내 독립영화 사상 479만명이라는 최고의 흥행신기록을 세운 작품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한 장면이다. 상업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국내영화의 열악한 유통 환경을 고려할 때, 본 작품의 행보는 기적에 가깝다. 76년을 함께 한 노부부의 사랑이 뭐 그리 특별할까 싶지만, 영화는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가슴으로 느껴지는 삶의 실재(實在)를 고스란히 보여주며, 많은 이들에게 ‘리얼리티 가득한’ 먹먹함을 선사했다. 소위 문화 예술은 그것의 향유라는 여가적 측면에서의 가치를 넘어, 한 사회를 구성하고 변화시켜온 개개인의 정신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단순히 개념이나 장식으로써의 문화가 아닌, 삶을 투영하고 현재를 논하며 교감할 수 있는 진행형의 가치를 함축하기에, 살아 숨 쉬는 문화, 예술을 통한 소통, 포용, 통합 등의 표현 등이 흔하게 언급되기도 한다. 가깝게는 광주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서울, 이천, 전주의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 등, 문화예술 인프라 구축과 다양한 컨텐츠 확보 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문화예술정책과 실효성 간의 실질적인 격차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2년 주기로 진행되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2014문화향수실태조사> 발표에 따르면 대중의 예술행사 관람률은 전체 71.3%에 이른다. 이중 영화 분야가 65.8%로 전체 관람률의 92.4%를 차지한다. 연간 기준으로 보자면 예술행사 관람횟수는 5회로 나타났는데,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을 고려할 때 미술, 음악 등 순수예술 분야의 관람횟수는 수치상 연간 1.71회 정도에 그친다. 한 장르에 치우친 대중의 기호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의 향수자들이 문화예술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방식은 전문가 집단보다 외려 냉철하고 근본적이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창작자라는 타인이 만들어낸 결과물 혹은 감성에 단순히 공감하는 차원이 아닌, 타인의 감성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그 감성을 직접 체감하는 경우 교감의 증폭은 더욱 넓혀진다. 미술 전시를 다루는 필자는 현장에서 이러한 상황들을 종종 발견한다. 예술의 형식이 현대적이고 난해하든지 간에, 보는 주체는 작품의 밀도와 내용을 본능적으로 잡아내며 매우 투명하게 반응한다. 전시장 안에서 현란한 미디어 숲을 조성하거나 한 달여 내내 식물을 키우는 과정을 보여주어도 낯설어 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자연의 모든 감각을 느끼거나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한다. 엄마와 함께한 어느 사진작가의 유년시절의 추억에서, 홀로 계신 아버지의 거친 손을 닮은 도로 위 버려진 장갑에서 때로는 울컥하기도 한다. 가족의 얼굴을 쏙 빼닮은 군상 무리의 면면을 보며 웃음 짓다가 자못 골똘한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양념에 버무린 배추를 재현한 설치작품 앞에서는 “고춧가루가 더 들어가야제, 여간 싱겁겄소”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76년을 해로(偕老)한 노부부의 일상이 새삼 화제가 되었던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특별할 것이 없을진데, 도리어 특별한 감흥으로 다가오는 현상이 한편으로 안타깝지만, 그만큼 ‘사람다운 것’이 그리운 요즘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소 씁쓸하다. 어찌 보면 머리와 가슴, 그리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문화가 절실한 때이기도 하다. 결국에는 우리네 소소한 사람살이의 가치가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각인될 수 있다면 좋겠다. 사람이 귀한 줄 모르고, 그것을 위한 학문 또한 귀한 줄 모르는 시대이기에……, 고영재 전남매일 생생문화토크 칼럼(롯데갤러리 큐레이터, 2015. 2. 1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