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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늑한 도서관-기억 최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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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윤처사 작성일17-04-23 11:34 조회2,6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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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늑한 도서관

    - 기억, 최하림 선생님


    최하림 선생님을 처음 뵌 건 광주 전남일보 논설실에서 였다. 문화부에 갔던 길이었던가? 당시 채복희 선생께서 부장이었고, 남신희 기자가 문학 담당을 하고 있었다. 친구 윤주식은 “뭐하냐?‘고 물으니 노조위원장이라 했다. 학과 선배인 신안 출신 소설가 정명섭 형이 논설실에 있었다. 첫 만남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좀 후엔 내가 일하고 있는 [월간사람사는이야기]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셔서 매달 사무실에 꼭꼭 들르셨고,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편집회의를 하면, 편집장이었던 내가 동석해 위원들의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서울에서 김지하, 김현과 문화판을 섭렵하며 [학원]지 기자까지 하셨던, [김수영평전]도 쓰고 박수근 등 화가들에도 정통한 그분의 내공은 한마디 한마디가 내게 금과옥조였다. 더러 편집위원과 일선 기자 사이의 이견 같은 것도 종종 노출되곤 했는데, 선생께서 중간에 잘 조율해주시곤 했다. 위원들 사이에서도 신망이 있으니 그분의 말이면 대개 상황이 정리되곤 했다.

    [월간사람사는이야기](사장 강봉규)는... 지금은 사라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잡지지만, 1990년대 초 광주에서 발행되던, 사진과 글을 조합한 의욕적인 책이었다. 그때 나는 [Nnational Geographic]과 [뿌리깊은 나무]를 전범으로 삼았었다. 유료구독자가 월 3천명에 육박했고, 그 외에도 5백부 정도를 더 찍어 늘 책이 남아돌곤 했다. 당시 잘 나갔던 무등건설 박모 사장께서 매달 현금 5천만원씩을 지원해주셨으니 재정구조도 탄탄한 편이었다.

    암튼 그때 최하림 선생님을 자주 뵙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러다가 책이 폐간되어버렸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무등건설이 힘들어서 지원금도 줄었고 자생력도 부족했었던 것 같다. 편집장일 때 나는 매달 크라운판 12페이지를 차지하는 커버스토리를 비롯해 7-8개의 꼭지, 매수로는 300매에 육박하는 원고를 썼다. 글들은 그냥 앉아서 쓰는 게 아니라 취재를 해서 써야 하는 글들이어서 정련된 글이라기보담 그저 메꿔나가는 수준이었을 거다. 해서 언젠가 나는 선생님께 찾아가 직장인으로서의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으나, '나는 경영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셨던 것 같다.

    그때의 경험은 뒤로 내가 프리렌서로 일할 때 꽤 유용한 경험이었다. 전라도 각지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던 네트웤에다 현지사정들에 밝았으니 서울의 시사지나 여성지 등에서 요구하는 취재 아이템을 수월하게 소화해낼 수 있었다. 선생님은 늘 ‘그런 거지 뭐’라 하시며 새로 글쓰기를 시작한, 지금은 잘 알려진 작가가 된 장석남, 문태준 같은 이들을 보라며 내게도 작품들을 가져와 보랬지만 나는 그닥 많은 작품들을 보여드리진 못했다.

    [미국의 송어낚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상실의 시대] 같은 하루끼의 작품들을 읽었던 것도 선생님 덕이었다. 니코스 카잔차스키와... 내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작가들을 접했던 것도 모두 선생님 덕이었다. 뿐만 아니라 실전수업도 시키셨다. 어느 날은 나를 부르더니 목포 행남자기 창업자 이준형(작고) 회장님의 생애사를 받아쓰라고 하셨다. 그 원고는 [한국경제]엔가 연재되고 난 후에 출간되었을 것인데, 그분의 삶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내게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함평 출신의 한 소년이 각고의 노력 끝에 자기산업의 신기원을 이룬 거였다. 한 6개월여 1주일에 한두번씩, 갈 때마다 점심시간을 포함해 대여섯 시간씩 얘길 들었는데, 기업을 시작한 분의 이야기는 '돈 있는 사람들'을 백안시 했던 어린 나를 깨우쳐 줬다. 아마 선생님은 내가 그걸 깨닫길 바래셨던 것 같다.

    잡지가 폐간된 뒤 나는 새로 만들어진 사단법인 민예총 광주지부에서 윤만식(마당극) 형,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김연아(현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와 함께 사무실 일을 하며 자유기고가로 돈벌이를 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내게 늘 오라 해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곤 했다. 뒤로는 전남일보가 힘들었을 무렵 같은데, 선생님과 사모님, 소설가 김유택/정명섭,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 주로 명섭이형의 차를 타고 주말마다 남도 곳곳을 돌아다녔는다. 대개 이름없는 그런 곳이었다. 산수유꽃도 보러 가고, 매화꽃도 보러 가고, 순천에도 가고, 화순 유마사, 옹성산, 백수 해안과 칠산바다, 여름날의 강천사... 한 두 해 남짓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선생님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미술 이야기는 그때 많이 해주셨던 것 같다. 만났던 화가들, 대상을 보는 방식과 태도 이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생각난다. 산수유를 보러 갔을 때, 어느 집 마룻장 밑에 있는 욕심 난 사기그릇이 뒹굴어 다니고 있었는데, 내가 ‘저거...’ 하며 욕심을 내자 선생님이 ‘확 가져와버려’라며 내 대담하지 못함을 탓하셨다. 다니며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질 않는데, 선생님이나 명섭이형은 신문사 일로 답답하던 머리를 그렇게 식히는 듯 했고, 김유택 선생님과 나는 따라다니기만 하는 편이니 그저 좋았다.

    뒤로 선생님은 전남일보를 그만두셨다. 그분이 광주에 계셨으면 좋았을 것을... 선생님이 전남일보를 그만 둘 무렵 채복희, 황풍년, 남신희, 윤주식, 정명섭 등 내가 아는 사람들도 모두 그만뒀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은 훌쩍 금강 상류로 살러 가셨다. 기억 난다. 풍경의 중요함을 말하셨던 걸... 그곳 충북 영동 집 풍경은... 먼 앞들에 넓은 강이 펼쳐져 있었고,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그리 높지 않은 뒷산이 있었다. 그곳에서 선생님은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1998)를 펴내셨다.

    한때 나는 [월간미술] 리포터를 한 적도 있는데, 그걸 할 무렵에 광주비엔날레가 생겨서(1995) 여러 일들도 많았다. 그때 선생님은 지나치게 ‘나대는’ 내가 못마땅했을 것 같은데, 만날 때마다 웃기만 하실 뿐 그리 질책하진 않으셨다. 뒤로 그곳에 들어가 일하게 됐다고 하셨을 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라고, 힘 없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담대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그때, 선생님과 전라도 곳곳을 여행했을 때 나는 그분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 생각해보면 축복이었다. 언젠가 인류학을 하는 어느 독일 여자분이 ‘사람은 도서관이다. 한 사람의 일생에는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우주와 지구, 인류의 역사가 다 축적돼 있다’고 했는데, 최하림 선생님이야말로 내겐 정말 아득한 도서관이었다.

    그때 함께 다녔던 분들이 그립다. 사모님은 아직도 양평 그 집에서 사신다고 들었는데,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김유택 선생님은... [어메이징 그라스](문학과지성사)를 낸 이후 칩거하시며 [보라색 커튼](문학과지성사)을 또 내시고... 명섭이형은 신문사를 그만둔 뒤 광주에서 출판인쇄 기획일을 했었는데, 힘들었었다. 형수가 한겨레신문에 근무하게 돼서 형은 광주에서 형수는 서울에서 그렇게 주말부부로 지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 나는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회억’의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자린 만들어지진 않았다. 아니다. 어젯밤 제사상머리엔 그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모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랬을 거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실속 있는, 그분을 기리는 자리가 아직 만들어지진 못한 것 같다. 나야 뭐 그리 긴 만남도 가지지 못한 ‘방외지사’ 처지라서 누구에게 이러자 저러자 말 할 처지가 못 되지만, 누군가가 나서서 그런 기회를 엮어갔으면 좋겠다.

    그분은 가셨으되, 작품을 비롯한 흔적들이 남아있으니까 그 아름다움을 더 깊고 넓이 살려갔으면 좋겠다.

    멀리, 선생님이 태어난 안좌도 쪽 바다가 보인다.

    - 윤정현, 일지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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