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품은 그림자 - 오지호의 '남향집'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15-10-27 13:39 조회3,805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본문 기억을 품은 그림자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아직은 찬 기운이 남아 있는 경칩 무렵 어느 오후, 화가는 아주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말랑해진 흙이 선사하는 신선한 계절 냄새가 따스한 봄볕과 함께 어우러진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이 이내 유연해지는 느낌이 들고, 한숨 들이마신 봄 내음처럼 화폭은 다채로운 색들로 물들여진다. 어릴 적 교과서로 배웠던 우리국토에 대한 단골 소개문, 즉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라는 설명에서 떠올릴 수 있듯이, 한국의 절기는 계절마다 독특한 내음과 색깔을 지닌다. 변화무쌍한 계절만큼 생동하는 일상이 우리네 사는 모습이지 싶다가도, 삶과 유관한 자연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는 정작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더불어, 도시에서의 삶이 익숙한 현대인에게 민낯 그대로의 자연은 일종의 향수(鄕愁)와도 같다. 우리는 종종 그러한 그리움을 문학이나 음악에서 혹은 미술작품에서 투영하기도 하고, 자연과 함께한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애틋한 서정에 잠기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글쓴이가 오지호 화백의 작품 <남향집>을 통해 들춰내고 싶은 것은, 여느 사람의 오래된 기억 속에 자리한 자연의 풍요로움이다. 풀어서 얘기하자면 소중한 추억과 함께 버무려진 ‘그 때의 하늘, 그 때의 바람, 그 때의 햇살, 혹은 그 때의 풀잎, 꽃, 물빛’ 따위이다. <남향집> 속 계절은 글의 서두에서 표현한 것처럼 이른 봄날이다. 초가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아래서 졸고 있는 새하얀 백구, 그리고 녀석의 밥그릇을 들고 막 정제문을 나서는 붉은 원피스의 어린 소녀, 그 사이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보랏빛 그림자는 유난히도 눈에 들어온다.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나무 그림자 안에는 소녀의 드레스를 닮은 붉은빛도 보이고, 백구의 털 색깔을 닮은 흰색도 보이고, 지붕의 이엉 색을 닮은 흙빛도 보인다. 무엇보다 봄날의 맑은 공기와 하늘빛을 그림자에 그대로 드러낸 과감한 표현력에서, 화가가 지니는 빛에 대한 확신, 나아가 자연에 대한 그 애정이 얼마나 확고한 것이었는지를 새삼 짐작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의 땅’이 뿜어내는 생명력과 밝은 기운을 회화로써 여실히 드러내고 싶었던 오지호 화백의 다짐은, 세대를 막론하고 여전히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이는 그분의 화풍이 우리의 근원적인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일 터이다. 남향집 속 그림자는 단순히 실증적인 태도의 서구의 인상주의를 답습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 함축하는 생명력에 천착한 결과이다. 어찌 보면 우리의 햇살 아래 태어난 우리 식의 빛의 예술이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우리 안에 내재된 가치 있는 삶의 추억까지도 담보한다. 글쓴이는 청색의 선명한 그림자에서 유년 시절의 자잘한 편린들을 떠올린다. 한정 없이 맑아서 시원하기 그지없었던 하늘, 온 집안을 가득 메웠던 장작 타는 냄새, 갓 태어난 백구 새끼의 칭얼거림이 사랑스러웠던 어느 오후 한때, 그리고 햇살이 내리 쬐어 눈이 부셨던 너른 산밭 등, 의미 그대로 마른 일상에 꽃이 피는 것을 느낀다. 눈이 부시게 맑은 날에는 그림자에도 색깔이 묻어나는 것처럼, 하나의 작품은 우리의 삶을 품어내기도 한다. 남향집의 그림자는 그러한 ‘삶의 기억을 품은’ 그림자가 아닐까 싶다. - 고영재 (광주롯데갤러리 큐레이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