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화예술의 자생력에 대해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15-04-07 19:58 조회3,705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본문 지역 문화예술의 자생력에 대해 변기 위에 미니어처 남녀 한 쌍이 자리한다. 여자는 풀린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구조물에 달라붙어 흐느적거리는 남자는 몸을 채 가누지 못하고 토사물을 쏟아냈다. 여자의 멍한 동공과 구역질의 여파가 괴로운 듯한 남자의 몸부림이 이색적인 이 상황은 어느 조각가의 <合 100>이라는 작품이다. 이는 필자가 2009년 예술가의 생존을 주제로 기획했던 전시 <Survival kit>전의 출품작 중 하나였다. 생존에 필요한 구호용품을 뜻하는 ‘Survival kit’는 보통 조난에 대비한 약품, 식량 등을 담는 용기를 지칭한다. 살아 있음과 동시에 살아남음을 의미하는 ‘생존(生存)’의 개념을 통해, 혹독한 창작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예술가들의 현재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자리이다. 당시 나는 작가에게 작품의 내막을 물었고, 이내 답하기를 그들 부부의 이야기라고 했다. 어느 날 부부가 일 년 동안 벌어들인 수입을 계산했더니 백만원이었단다. 부부의 수입을 합한 금액이 100만원, 그러한 연유로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合 100’으로 명명했다. 열악한 작업환경이라는 그럴싸한 표현이 무색하게 창작행위 자체로만 먹고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지만, 소위 예술가의 자존감마저 말끔히 희석시켜버리는 일상의 무게는 작품에 드러난 것처럼 구토를 유발했을지도 모른다. 배고픈 예술가, 고뇌, 외로움, 창작의 고통 등의 감성적인, 즉 측은지심에 기초한 피드백은 여전히 현상의 본질을 왜곡시키지만, ‘예향’이라는 과거형 허상에 ‘아시아문화중심도시’라는 미래 지향적 뜬구름, 그리고 창작환경 지원을 명분으로 행해지는 지역 내 무분별한 레지던스 사업, 작가들에게 생색 내기용으로 쥐어지는 공적 지원금, 시민의 문화향수 증진 혹은 문화를 통한 지역경제 부흥을 부르짖으며 행해지는 일회성 프로젝트들을 보고 있노라면 헛헛하기 짝이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지만 문화의 중심을 선포하면 의미 그대로 아시아 문화의 중심이 되는가, 작업실만 제공하면 눈부신 창작물들이 쏟아지는가, 억대의 지원금을 내려주면 문화가 활활 꽃피울 수 있는가, 화려한 스펙의 유명한 작가 혹은 큐레이터를 모시면 이 지역이 유명해지는가? 골자는 자생력, 지속성이고 자의에 의한 문제제기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재고해보면 참 회의적이다. 문화를 만들어내는 주체 중 하나인 창작자가 바로 서지 못하고, 함께 끌어가야 할 이론가들이 부재하며, 쟁점을 관통하는 비평 또한 부재하는 환경 안에서 문화의 중심을 꿈꾼다 하니 자못 역설적이다. 문화예술의 글로벌리즘을 천명한다 하면 무엇의 세계화를 지향하는지, 어떠한 문화를 중심에 두는 지를 점검하지 않고 결국 외형만 키워온 형국이다. 소프트웨어가 부실하면 하드웨어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역피라미드형 구조의 산발적인 문화정책은 예술인들을 더욱 부화뇌동으로 이끈다. 결국 근원적인 문제제기가 없는, 합목적성이 배제된 문화는 예술과 예술인을 취미나 장식의 개념으로, 그리고 쟁이로 전락시킬 터이다. 수일 전 필자는 대기업이 지역예술과의 공존을 실험하고 있는 <와파아트샵>에 방문했었다. 쇼핑몰 내 아틀리에라는 시도가 흥미롭기도 했지만, 다양한 작가층이 어떠한 모양새로 군집해 있는지도 퍽이나 궁금했다. 모 작가에게 그 곳으로 들어온 후의 좋은 점을 물었더니, 안 추워서 좋단다. 우문현답에 퍼뜩 정신이 들었고, 미술로 밥 먹고 사는 필자로서 부끄럽기가 짝이 없었다. 어찌 보면 잡히지도 않는 이상과 허상보다, 우리 문화예술의 현재를 되돌아보는 작업이 절실한 때이기도 하다. 예술가를 좋은 예술가로 키울 수 있는 자생력이 구축될 때, 문화의 중심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고영재. 전남매일 생생문화토크 칼럼(롯데갤러리 큐레이터, 2015. 3. 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