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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입장에서 미술비평에 대한 평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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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은혜 작성일04-05-31 17:15 조회5,2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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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와 비평가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사람마다 세상사를 보는 시각들이 다 다르지만 작가와 비평가는 일반인의 일상적 관점과는 또다른 깊이와 냉철함 그리고 통찰력과 예지력같은 게 좀 다르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꼭 전문가가 아니라도 이러저런 일이나 어떤 대상에 대해 자기식의 판단이나 평가들을 자연스럽게들 하며 살고 있지만요.

    사실 어떤 사람이나 남의 일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말한다는 게 그리 쉬운 것은 아니기때문에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인사치레나 하는 경우들이 많고, 특히 논리적이거나 개념적 사고가 몸에 배어있지 못한 광주미술계 풍토에서는 누가 전시를 하더라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경우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며칠전의 교수신문 기사에 이와 관련된 글이 있어 참고해볼만하다 싶어 옮겨왔는데, 주로 비평과 평가를 받는 입장에 있는 작가들은 그 평자와 평론에 대해 어떤 생각들일까?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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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 미술비평의 조건은 무엇인가
    -- 교수신문 2004년 05월 21일자

    미술비평계에 주례사 비평과 이론비평이 넘쳐나고 있다. 둘 다 마땅찮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제해결은 쉽지 않다. 구조적, 시대적 문제가 복잡히 얽혀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정공법밖에 없다. 교수신문은 우리시대 비평의 문제가 무엇인지 화가들의 견해를 들어보기로 한다. 그들은 비평의 1차 독자이자 당사자이기 때문에 독자를 대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활동이 활발한 화가 9명에게 견해를 물어봤다.

    화가들은 평론가의 관점이 화폭 위로 돌출돼 나올 때 가장 큰 불만을 갖는 걸로 나타났다. 화가 손장섭 씨는 비평을 쓴 강수미 씨에 대해 “그의 글은 성실했지만, 자기 관점이 너무 강했다”라고 지적한다. 특히 작품에 대해 ‘인간부재의 풍경’이며, ‘관조와 관념의 태도를 보인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 “오해며 왜곡”이라고 비판한다. 손 씨는 평론가의 작품해석이 작가의 사물해석과 다를 수 있지만 화가가 만든 풍경을 다양한 시각으로 봐야 옳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씨는 자기 생각이 두드러져 정작 내 작품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작품에 대한 배려 부족

    권여현 국민대 교수(서양화)가 심상용 동덕여대 교수(미술평론)의 글에 대해 밝힌 심정도 비슷한 맥락이다. 권 교수는 “묘사나 해석에선 전문성과 성실성이 돋보이지만, 평가부분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즉 “평자가 내 작품을 자기 규범에 의해 틀 짓고, 작품 뒤에 숨겨진 의도보다는 표면적인 도상만으로 서술하고 비평했다”라고 말하며 그 원인이 평자의 강한 자의식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작품을 짓누르는 비평가의 자의식은 사실 ‘이론적 강박’에서 비롯한 것이기 쉽다. 심 교수의 비평 또한 권 교수의 작품을 ‘해체’라는 이론적 흐름 속에서 살핀 것이었다. 그럴 경우 작품은 이론적 흐름의 경향 혹은 징후로 축소되는 면이 있는 건 분명하다. 작가들은 이런 방식에 대해 “끼워맞추는 것”이라며 불만을 나타내지만, 이론적 흐름도 일종의 ‘당대성’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점은 인식되지 못하는 듯하다.

    화가 이종구 씨는 비평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한계도 있다는 양비론을 내놨다. 이 씨는 “평론도 독립된 것이며, 동일한 창작과정이지만 창작의 본질을 이해하지 않고 아전인수 격으로 쓴 비평은 보지 않는다. 평론가들은 미술사적 맥락은 잘 규정짓지만 내 작품세계가 어떻게 흘러왔는지에 대한 맥락은 잘 파악하지 못한다. 상상력의 한계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오히려 상상력의 한계보다는 비평가들이 작품을 꼼꼼히 뜯어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사실 한 작가에 대해 완벽한 글을 쓰려면 그 작가의 생애사에 얽힌 온갖 잡다한 콘텍스트를 비롯해 작품의 내밀한 흐름을 일상처럼 옆에 끼고 있어야 할텐데, 그런 스크린 작업이 안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화가들이 비평에 대해 흔히 보이는 반응 중 하나는 “의도를 잘못 이해했다”라는 것이다. 김경인 인하대 교수(서양화)는 “김광우 씨의 비평문은 내 작품세계를 잘 정리했다. 하지만 작품 전반을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다”라고 털어놨다. 김 씨가 춤사위 시리즈에 대해 비판한 것을 두고 “그 전시회에선 춤사위 수백 가지 중 한둘만 보여줬을 뿐이다. 김 씨는 몇 점만 보고 내 작품세계 전반을 평가했다”라며 비평의 일면성을 지적했다. 또한 작품 속에 다양한 표현들을 비판한 점에 대해서도 “나는 항상 단순하고 고정된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것을 시도하려 한다. 그런데 김광우 씨는 내 의도를 잘 읽어내지 못한 것 같다”라며 부분적인 이해만 보인 글로 평가했다. 전시회의 작품들은 작품세계의 극히 일부분이기에 평론가는 부분적인 이해로 왜곡할 수도 있다는 지적은 수긍이 간다. 하지만 보여진 작품을 중심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는 한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보여진 작품 속에서 ‘작가의 전모’가 드러나야 하는 화가의 역량이 중요한가, 아니면 보여진 것에서 작가의 전체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비평가의 상상력이 중요한가. 해석은 양자의 긴장관계 속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머리카락으로 작품을 만드는 작가 함연주 씨 역시 평론가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고 답했다. 함 씨는 “내가 쓰는 재료를 두고 내 작품을 곧바로 페미니즘적이라고 해석하는 평론가들이 있다. 하지만 재료만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사실 평론가들의 이런 오류는 매우 흔하며 선입견에 휘둘릴 때 자주 발생한다. 작가들은 평론가들의 고정되고 경직된 사유 틀을 문제 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부정적 견해에 비해 황우철 동덕여대 교수(서양화)의 경험은 행복한 축에 속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평한 미술평론가 고충환 씨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화가와 작품의 연관성을 통찰한 면이 돋보였고, 평자의 감동적 파동이 글을 통해 전달되는 매력이 좋았다”라는 것. 하지만 황 교수는 오늘날 비평의 기능이 “독설이거나 아니면 동시대인을 위한 안내일 뿐”이라고 한정시키는 관점을 보여줬다.


    잘 된 비평 매우 드물다

    반면 미술평론가 김광우 씨는 “화가들이 비평에 대해 불만할 게 아니라, 설득할만한 반론을 제시해야 한다. 관객들은 양자 사이에서 설득력 있다고 생각되는 쪽을 따를 것이다. 비평에 맞선 견해를 밝히지 않는 게 오히려 무책임하다”라며 그들의 불만에 맞섰다. 이태호 홍익대 교수(미술평론)는 “하나의 작품은 항상 다양한 해석에 열려있다. 평론가의 평이나 화가의 견해 모두 한 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일부 비평이 신중치 못하게 ‘모방했다’, ‘창조력이 떨어진다’와 같은 비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해 화가가 반론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라며, 양자간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공론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화가들도 찬성하는 편이다. 화가 김창겸 씨는 “왜곡된 해석이라면 그에 맞서 해명하고 싶다. 문제는 현재로선 담론의 공간이 전혀 없다는 것”이라며 화가와 평론가 사이의 의사소통공간의 부재를 문제점으로 꼽는다. 한 때 표절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는 안규철 한예종 교수(조각) 역시 “내 작품에 대한 표절론이 제기돼 나도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생산적인 토론이 되지 못하고 공방에만 그쳤다”라며 제대로 된 논쟁문화도 없음을 지적했다.

    전혀 다른 입장도 있다. 김병종 서울대 교수(동양화)는 작품비평에 대한 견해를 말해달라는 요청에 “화가가 비평에 대해 얘기한다는 건 부자연스럽고 거북하다. 그런 식의 반론에 익숙치 않다”라는 말로 비평에 대한 평가 자체를 꺼렸다. 송수남 홍익대 교수(동양화) 역시 “내 작품은 이미 내 손을 떠난 것이기에 화가가 평론에 개입해 왈가왈부 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라며 언급을 피했다. 화가는 오직 그림으로 말할 뿐이라는 이런 입장은 일견 이해가 가지만, 비평가와 말 섞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는 것 ‘폐쇄성’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싶다.

    물론 화가들은 대부분 비평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작가도 모르는 작품의 의미를 읽어 작품세계를 확장해주고, 다양한 관점을 발생시키는 비평의 전통 덕목을 알기 때문이다. 문제는, 화가들이 잘 된 비평이 ‘매우 드물다’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화가들이 비평에서 ‘평가’ 부분에 민감한 것도 사실인 것 같다. 비평을 전체로서 읽지 않고 평가부분만 탓하다 보니, 자연히 비평을 통한 화가의 자기갱신은 폭넓지 못하고, 비평에 대한 반응 또한 즉물적이며 제한적일 때가 많다.

    -- 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200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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