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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지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섬 - 보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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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윤정현 작성일15-02-01 14:59 조회3,1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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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의 ]

    육지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섬
    - 새해 첫날, 보길도 1

    보길도에 다녀왔다. 연말연시라고 해서 유별나게 부산을 떠는 걸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편이고, 그래서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경조사나 각종 모임도 잊고 사는 축이지만, 한번쯤 변격의 현을 튕겨보고 싶었다. 그 섬은 소설가 임철우가 장편 [봄날]을 썼던 곳이었고, 내가 광주비엔날레 일을 하는 내내 최고의 스승이었던 하랄드 제만 부부를 모셔다드렸던 섬이고, 시인 강제윤이 고향에 들어가 댐 건설을 막으려고 오랜 기간 단식을 했던 곳이고... 무엇보다 고산 윤선도의 섬이기도 하니까.

    태평양으로 탁 트인 절벽 위에 서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사는 일은 늘 그렇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폭설과 강풍으로 시계視界가 흐려서 원경遠景을 볼 수 없었다.

    그 섬에 사는 한 형을 만났다. 2년 전 볼라벤 태풍이 불던 여름 병실, 한 달 동안 같이 지내며 온갖 얘길 나눴던 분이다. 부인 일곱을 두고 강진에서 살았던 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나 섬에서 서럽게 자랐던 얘기, 일본으로 밀항해 살았던 얘기, 강제윤 시인이 단식을 할 때 얘기, 거친 파도를 헤쳐가며 사는 얘기들을 끝없이 나눴었는데, 두해가 지났지만 또 만나니 그런 얘기를 눈물 나게 들려줬다.

    강제윤의 동천다려는 광주에 사셨던 김원자 국장님께서 비파원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컨텐츠중심의 새 터전으로 일구고 계셨다. 주인은 입원중이라 집을 비운 상태였고, 약속을 어기지 못하시는 그분께서 겸사겸사 동생 내외와 김대현(한문학)-이선옥(미술사) 가족을 보내셨고, 나 역시 일행이 있었는데, 남도 땅끝으로 작업차 온 신태수(안동), 김범석(김제) 두 수묵그림 작가였다.

    세연정과 비파원이 있는 부황리에서 글쓴바위까지는 너무 멀어 망끝전망대로 갔더니 흡사 제주도 남원에서 바라본 바다 같았다. 말인 즉슨, 남자들은 파도와 바위, 새와 섬, 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원경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고, 여자들은 거센 바닷바람에 납작 엎드린 나무와 동백숲, 낭떠러지로 가는 오솔길과 풀섶에 더 눈이 가는 것만 같았다.

    김대현 선생님과의 얘기는 꿈길 같았다. 옥소대를 오르는 숲길에서 우리는 산돼지가 파헤쳐서 버려진 묏둥을 보고, ‘이 정도에 이를 지경이면 파묘해서 화장을 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했다. 세연정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바다는 간척돼 지금은 쓸모없이 버려진 땅이 되어 있었다.

    세연정에서 나는 다산유물관에 전시된 다산 정약용의 학적 계보도를 보면 퇴계 이황을 기점으로 말석에 그려져 있다고 했고, 김선생님은 너무나도 연구가 부족해서...‘라고 말꼬리를 낮췄다. 김선생님은 윤이후를 비롯해 우리에게 미답未踏의 인물들이 너무너무 많다고 하셨고, 나는 누구보다 방산 윤정기의 연보만이라도 정리해서, 먼 대중들은 차치하고라도 집안 후손들이라도 우선해 볼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부끄럽고 애닲다.



    낙서재의 풍수는 열락
    悅樂이었다. 시골에 살러 오며 나는 고향땅을 잘 아시는 풍수 어른을 한분 쯤 찾아보고 싶었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런 분들이야말로 이 땅을 제대로 아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글로 써보고 싶어서다. 고산 역시 당대 최고의 풍수였으니 낙서재 또한 최고의 안택이었을 것. 섬이지만 섬 집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랬다. 보길도는 바다도 아니고 육지도 아니지만, 뒤집어보면 바다이기도 하고 육지기도 한 곳. 기실 호수의 한복판에서는 호수의 많은 것을 볼 수 없고, 어쩌면 먼 데도 가까운 데도 아닌, 그 가장자리를 배회하는 사람이 호수를 더 잘 알 수도 있는 법이다.

    동천석실에 오르는 이들은 가뭄에 콩인 모양이었다. 늘 그렇듯 우리들의 여행은 풍편으로 듣거나, 건너다보기, 그도 못해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기 마련. 근래 완도군에서 두 채의 정자를 지어놨었다. 그 위 정자에 앉아 비파원에서 가져온 비파차를 나눠마셨다. 그 맛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내처 나는 내 이름으로 된 땅 한 뙈재기 없는 놈이 비파나무 묘목을 구해달라고 말해버렸다.

    2월에 다시 낙서재 뒷산에 올라봐야지. 딸애도 불러야겠다. 아비의 일상에는 그닥 별무관심이고, 나와는 좋은 게 너무 다른 서울 사는 대학생 딸에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자리에 제 몸을 맡겨보라고 할 참이다. 대학도 떨어지고 군대 입영신청에서도 두 군데서나 떨어졌다는 친구의 아들도 불러와야지... 생강나무꽃이며, 복수초, 고사리, 송순...

    혹자는 낙서재에서 동천석실까지 도르레를 만들어 음식을 끌어다먹었다는 사실을 들어 그의 호화생활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입 달린 사람이라면 어느 말이든 내뱉을 수 있는 법이되, 혹여 생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말이 다시 자신에게 어떻게 돌아올 것인지를 짚어들 봤으면 좋겠다. 이 발달한 대명천지에 그런 말들의 홍수를 거슬러 오르는 노를 저으며, 그가 그곳에서 도교적 일상에 어떻게 빠져 지냈던 곳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그런 앞날을 만들어갈 이 어디에 있는지?

    예송리의 일출은 내게 지나친 사치 같았다. 내가 지금 거처하고 있는 명발당은 서향西向이어서 도연명의 저녁정취만 질리도록 그윽한데, 도대체가 아침이라니? 맹골수로가 머잖은 그곳이지만, 수천 수 만년간 바닷물에 씻겨서 제각기 하나씩의 달덩이가 된 몽돌들과 파도와 섬들 사이의 어둠을 뚫고 해가 솟아올랐다.

    /사진 윤정현 (-미학)
    그림 김범석 (수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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