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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으로 날아오르고 싶었던.. 강진 도암 학장교회 서까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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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윤정현 작성일15-02-01 15:10 조회3,4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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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의 2]

    천국으로 날아오르고 싶었던 첫 마음
    - 강진 도암 학장교회 서까래


    시골길을 걸었다

    . 우리 집에서 세 고개 구불구불한 언덕을 넘으면, 거기 숲 속에, 나처럼 도시에서 떠나 온 한 형이 살고 있기도 하려니와, 전에도 자주 다산초당이나 읍내에 가려면 부러 반듯한 포장길을 놔두고 지나던 길이다. 그 길 언저리엔 선조들이 묻혀 있는 선산도 있어서, 나는 늘 봄날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필 때, 혼자 그 호젓한 솔 숲길을 지나곤 했었다. 학장교회엔 아무도 없었다. 햇살 따스한 겨울날, 살랑거리는 댓잎소리를 들으며 도둑고양이처럼 교회 안 여기저기를 기읏거렸다.

    이 회당은 1937년에 지어졌으니 도암에선 가장 오랜 78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강진의 교회사상 이처럼 오래된 건물이 원형대로 유지되는 건 드물 듯한데, 그것은 무엇보다 이곳이 가난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교회 신도는 할머니 7, 할아버지 한분 이렇게 8명이다. 목사님 한분. 마을엔 12가구(6가구는 창녕조씨)13명이 사니까, 네 명 빼곤 모두 신도다. 일요일 아침마다 그 교회에서 들려오던 구강포의 종소리...

    건축물 78, 교회사 108년의 도암 학장교회

    회당은 한적한 시골동네의 앞자락, 집집마다 토방마루에서 내다보이는 언덕 위, 마을 정면을 약간 비켜선 사선으로 서 있다. 들어가는 길은 여느 종교건축물이 그렇듯 약간의 높이를 걸어 올라가게 되어 있고, 거기 돌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건물은 토방마루를 낀 4칸 접집, 목조 한옥이다. 토방마루 밑은 시멘트로 막아놨지만 기둥 밑 옆 부분을 초승달처럼 살짝 터서 살금살금 고양이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출입구가 두 개다. 남녀가 유별하던 때에 지어졌고, 성균진사 成均進士館였던 태계(苔溪)선생의 사당이 있는 자자일촌이니 그랬을 거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단아한 신발장이 붙박이로 짜여 있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곳엔 이즈음 어지간한 시골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공간이 펼쳐진다.

    마룻바닥은 송판을 길게 켜낸 판재를 깔아 오랜 세월 닿고 닿은 윤기가 반질반질 했다. 거기 단상을 향해 양쪽에 다섯 개씩 의자가 놓여있는데, 예전엔 남녀를 구분하는 칸막이가 있었다고 한다. 단상 뒤편 정면에는 목회자가 앉는 감실 형태의 정면 주공간이 있고, 좌우로 기물들을 보관하는 작은 방들이 붙어 있다. 그리고 머리 위 천정에서 천국의 세계가 펼쳐진다.

    근처 삼수골에서 켜왔다는 나무들엔 이 건물을 지었던 사람들의 마음과 바램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반가의 목재처럼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긴 목재들은 초창기 이 교회 사람들의 마음을 닮았다. 1900년 전후 최초의 신도들, 그러니까 항촌 안태골에 살았던 4가구 사람들은 십중팔구 서럽고 시린 삶의 구원을 찾아 왕복 40십리는 족히 되었을 길을 따라 예배를 보러 다녔다. 도암 소석문을 지난 해남 옥천 백호교회였다. 깊은 협곡, 그 길은 얼마나 아득했을까? 찬송가를 부르며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거나 눈길을 걸었을 거다. 요단강 건너... 그러다 1907년에 동네 어느 작은방을 비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1910년에 18평짜리 작은 예배당을 손수 지었다.

    그 뒤 신도들이 전도를 위해 세곳(만덕, 운동, 항촌)에 교회를 지어나갔고, 1937년엔 이곳에 터를 잡아 교회당을 옮겼다. 그 아득한 마음을 말해 무엇하랴. 누구는 대밭 땅을 내놓고, 여신도들은 대 뿌리를 캐냈으며 남신도들은 산을 넘어 삼수골에서 나무들을 잘라왔다. 당시 시골 사람들은 어지간한 목수, 토수, 석수, 대장장이들이었으니 사람을 따로 쓸 리 없을 터.

    서까래의 천국과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 반듯한 소나무로 짜여진 천정은 이 지역 전통 한옥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땅을 다지다 나왔을 법 한, 나지막한 돌로 된 4칸의 석축 위에 10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대들보를 걸친 다음, 높이를 더하기 위해 그 위에 중방을 얹었고, 거기에 도리 기둥을 세워서, 맨 위 횡축으로는 가늘고 긴 용마루를 누였다.

    서까래들의 가지런한 줄맞춤은 흡사 소녀 애들의 수줍은 옷맵씨 처럼이나 단아하고 예뻣고, 그 사이의 면들을 하얀 회칠로 마감했었다. 나무들은 죽어 색의 나이를 먹는다. 짙은 먹갈색을 띈 나뭇결들은 매끈한 니스칠로 반짝거렸지만, 새촘하게 옅은 누나의 립스틱만 같았다.

    나무들의 생김새 또한 교회를 지었던 일손들의 단아함을 살갑게 보여줬다. 돈이 많아 큰 목재를 깎아 각재로 쓸 수 없어서였음이 분명한, 거의 둥근 원형 그대로의 나무둥치를 가냘픈 처녀의 살결처럼 곱게 깎아 들보나 마루로 사용했는데, 제각기의 그 구부러진 형태를 너무 잘 살려지었다.

    건물 곁에는 교회당보다 더 큰 크기의 목사님이 사시는 벽돌식 양옥 사택이 있었는데, 아쉽지만 어쩌랴, 우리네 살림살이는 보는 이의 미감美感보다 사는 이의 실용성을 너무 앞세우기 일쑤니까.

    그 곁에는 창건 당시부터 사용했던 것 같은 키 낮은 흙돌담에 벽돌을 덧대어 보수해서 양철문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칫간이 있었는데, 대 뿌리들이 파고들어가 거의 스러질 날이 멀지 않은 듯 했다. 일을 보고 난 뒤엔 짚풀로 밑을 닦고 손을 씻었겠지... 처녀애들은 또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까?

    동네 지형은 뒷산을 배경으로 좌우 양쪽에 산줄기를 두르고 그 한 가운데 집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마을 앞에 조그맣게 있는 논들에서부터 먼 들판, 그리고 환영 같은 구강포 앞바다가 있었다. 성균진사를 하셨던 선대께서 태계苔溪 즉 그윽하게 깊은 산중 계곡의 이끼나 바다 속 김이나 미역, 파래, 감태, 매생이 같은 것들을 좋아했을지 모를 일이다.

    한겨울의 따듯한 오후시간엔 혼자 사시는 한 할머니의 작은 집에서 구역예배를 본다고 했다. 예배는 할머니들 일곱 분과 목사님 뿐이었다. 노인들이 모여앉아 추위를 이겨내는 작은 방 가운데에 둘레상을 갖다놓았고, 거기 나이 든 여자 목사님(박미미)이 오셔서 사도신경, 찬송, 성경봉독, 설교, 찬송, 주기도문으로 이어지는 예배를 집전했다.

    예를 마치고 돌아가시는 할머니들을 따라가 봤더니 집집마다엔 어렸을 적 옛 삶의 소담하고 정겨운 풍경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궁이에 넣어 불을 피우지도 못한 콩대들도 버리지 못하고 헛간에 쌓아놓았고, 집집마다엔 지난 가을 산밭에서 수확한 수숫대 모감지단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다.

    예전엔 남자들이 빗자루를 매 썼다 했다. 내처 나는 어렸을 때 빗자루를 매 본 적이 있노라며, 주시면 만들어 써보겠다고 했더니,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그것들을 꺼내주었다. 세분이 앞다퉈 수숫대를 주셨는데, 아직도 남은 것들은 또 쓸라믄 다 가져가라고 하셨다.

    -
    윤정현, 작가/-미학

     


    관산에서 이곳으로 오신 목사님 중매로 열다섯에 시집 와” (강정수, 89)

    장흥 관산 부평리 진주강씨 집안에서 태어난 강정수 할머니는 올해 나이 89살이다. 창녕조씨 자자일촌의 이 마을에 단 두 분밖에 없는 할아버지 중 한분인 조규송(92)씨와 자식들의 도움으로 아직도 단란한 노년을 지내시는 할머니는 열아홉 살에 시집왔다.

    그곳 교회에 계시던 목사님이 이곳으로 부임하셔서 이 마을 총각 신도와 중매를 섰기 때문이다. 올해 나이 63살의 큰아들 조기현(이장)을 비롯 막내딸 조순복(52)까지 42녀를 12년 만에 낳으셨으니 젊은 금슬이 무척 좋으셨으리라.

    귀가 많이 어두워서 큰 소리로 말해야만 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아로새겨져 있다.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을만치 허리가 굽었고 힘도 없지만, 건너 산 속 엉덩짝만 한 밭에 퇴비를 뿌려 감나무 밤나무, 두릅, , 엉겅퀴, 당귀 등속을 기르는데, 자식들이 잘 가져가 먹지 않기 때문에 거의 수확을 못하시고 버린다.

    학장교회 안 천정

    87년의 세월 동안 먹갈색으로 멍든 나무들의 변주. 근처 삼수골에서 손수 켜온 목재들의 둥근 형태를 대패로 살짝 벗겨 긴 용마루나 대들보를 만들었고, 나무의 굽은 형태를 잘 살려서 구조를 완성했다. 서까래들은 팔뚝만 한 정도에 불과하지만 줄지어 서있는 수줍은 소녀의 맵씨처럼 소담하다.

    학장교회 전경

    마을 정면 언덕에 안택구조와 사선으로 자리한 건물은 전형적인 4칸 접집의 시골집 한옥구조다. 입구는 약간 굽어 올라가는 둔덕 구조고, 밑 부분은 전체가 마룻장, 남녀가 따로 출입할 수 있도록 두 개의 문이 따로 있다.

    교회에서 본 마을

    마을엔 12가구에 13명이 사는데 7명이 할머니 2명이 할아버지고, 8명이 신도, 1명이 목사님이다. 창명조씨 자자일촌이어서 성균진사成均進士館였던 태계(苔溪)선생의 사당이 있다. 마당에 창건 때 심은 벚꽃나무가, 회당 뒤편으론 대나무가 둘러쳐 있고, 집들마다에서 잘 보이도록 높이 세운 종탑 너머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들이 있다.

    혼자 사는 한 할머니 집

    대부분 할머니 혼자 사시는 이 마을 신도들의 한 집. 벽들은 무너지고 살림살이가 어지럽게 널려있지만, 이 집은 마당을 높인 돌기단 위에 5칸이나 되는 접집 구조다. 안방을 중심으로 옆에 광방, 부엌이 있고 양쪽에 사랑방과 갓방을 둔 큰 집이지만, 머잖아 이런 집들은 살던 분이 돌아가시면 10년이 못돼 무너져 내려버린다.

    할머니들이 갖고 계셨던 수숫대

    지난 가을 수확 때 남은 수숫대를 이용해, 예전에 힘 있는 남자들이 있었을 때는 빗자루를 매 쓰곤 했던 기억 때문에 할머니들이 갖고 계셨던 수숫대. 하지만 지금은 빗자루를 맬 남자들이 없기 때문에 쓸모가 없지만, 집집마다 헛간에 그냥 갖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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