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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과 제자 지인들에게 듣는 오지호의 삶과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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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211.♡.20.74) 작성일20-12-08 13:42 조회2,1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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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호 아카이브전 '팔레트 위의 철학' 전시 중 인터뷰영상실

     

    가족과 제자 지인들에게 듣는 오지호의 삶과 정신

    오지호 아카이브 전시 영상인터뷰

    2020.12.04.()-12.13(), 은암미술관

     

    오지호 아카이브 전시가 은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오지호 재조명 아카이브와 관련해서 그분의 일상 삶과 활동 등을 가족과 제자, 지인들로부터 들어보는 인터뷰 영상이 미술관 2층 한 코너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상실 여사는 오지호 화백의 둘째 며느리로 69년 결혼 이후 작고하실 때까지 매일같이 그 분을 모셨고, 지금도 홀로 지산동 초가에서 홀로 아버님의 숨결을 관리 보전하며 지내고 있다. 처음 시집올 때만 해도 지산동 주변이 온통 밭들이었고, 나중에 허리가 굽으실 정도로 어머님이 오 화백을 극진히 챙기셨다 한다. 오 화백은 매일 11시부터 1시까지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셨고, 사과궤짝으로 만든 소박한 탁자에서 늘 뭔가 원고를 쓰셨다. 늘 바쁜 걸음으로 오가시다가도 점심 후에 고단해서 한 숨 부치시는 사모님의 베개가 틀어져 있으면 바로해주며 토닥거리시고는 일을 보시곤 했다. 서울 화랑들에서 꼬냑과 현금을 들고 찾아와 그림을 부탁해도 겨우겨우 나중에 한 두 점 받아갈 수 있었고, 한자교육운동하실 때 이희승씨나 학자 관계자들이 자주 드나들었는데, 국어학자들이 어문교육에 좀더 열심히 해주었더라면 당신이 그림을 좀더 그릴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한다. 식사 때면 꼬냑을 한잔씩 딸아 주시기도 하고, 딸이고 며느리고 늘 똑같이 대하셨던 모습을 떠올리면 눈물 나려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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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호 화백의 둘째 며느리 이상실 여사의 인터뷰 중

     오승윤 화백의 딸로 미국에서 활동 중인 손녀 오수경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늘 새벽 4시쯤이면 일어나 한복차림으로 전구를 켜고 궤짝상자 앞에 앉아 빨간줄 원고지에 파란색 만년필로 뭔가를 열심히 쓰고 계시곤 했다 한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것보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라고 하셨고, 작업하는 시간만큼은 화실에 들어오지 말라시며 집중하셨다고 한다. 지금 화가로 활동하면서도 할아버지 영향이 커서 자연을 소재로 한 구상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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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호 화백의 손녀 오수경 작가의 인터뷰 중

    조선대학교 미술과 1회 졸업생인 김영태 화백은 대학 건물이 공사 중이던 초창기에 양림동 YMCA 공간을 빌려 대학강의가 이루어졌고, 한국전쟁 후에 오지호 선생님을 학교에서 자주 뵈었다고 한다. 오지호 화백 말씀 중에 송악산나무꾼과 치과의사 얘기가 인상 깊었다 한다. 땔감이 귀하던 시절 생나무를 손대다 들키면 엄중했던 처벌을 피해 자기가 짊어지고 내려오는 만큼 나무를 베어놓아 다른 사람이 죽어 마른 나무를 가져갈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얘기다. 치과의사는 환자가 자기병원으로 다시 온다는 보장이 없어도 웬만하면 이빨을 빼도록 해서 다른 치과의사가 단순치료 이상의 수입을 얻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림 이야기보다는 한자얘기를 주로 하셨는데, 통학전차 안에서 여학생들이 폭소가 터졌는데, 남학생 명찰이 임신중이었다는 우스개소리를 하시면서 한글음 만으로는 뜻이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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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대학교 미술과 1회 졸업생 김영태 화백의 인터뷰 중

    조선대학교 초창기인 50년대 전반에 미술과를 다녔던 조규일 화백은 대학 2학년 마치고 선생님 천거로 진도중학교 미술교사로 가게 됐는데, 학업도 못 마친 어린 제자를 섬에 보내놓고 안스러워 편지로 계속 지도를 해주셨다 한다. 그분은 강의에 워낙에 열정적이셔서 다른 과 학생들도 많이들 듣곤 했고, 맑고 청신한 색을 써야하며 잔인하거나 어두운 소재의 암흑성 회화는 배체하라고 가르치셨다. 볼륨을 중시하는 유럽 사람과는 달리 우리 의복은 색조의 선율이므로 위아래 색을 다르게 입어야 한다는 생활미학이나, 의사들이 포기한 죽음 직전 상황에서 단식요법으로 스스로 극복해낸 얘기며, 한문교육을 교본을 만들어 제자들이나 군부대에 보내 익히도록 하셨다. 울릉도에 스케치여행을 다녀온 사흘 뒤에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반년을 고생하다 돌아가셔서 너무나 마음 아프고 애석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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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조선대학교 미술과에서 오지호 화백의 지도를 받았던 조규일 화백의 인터뷰 중

    황영성 화백은 오지호 화백 사직 후에 학교를 다녀 직접 지도를 받지는 않았지만 친구 오승윤 화백 때문에도 지산동 댁에서 종종 뵐 수 있었다. 가면 늘 따뜻하게 대해주셨는데, 그림 이야기보다는 한문 얘기를 종종 하셨는데, 한글과 병행해서 한자문화를 해야 우리 문화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그분은 스스로 영향력을 내보이려 과시하지도 않고, 워낙 점잖은 분이셔서 옆의 미술논쟁에 끼어들지도 않으셨으며, 누구를 배타적으로 말씀하지도 않으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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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호 화백의 조선대학교 후배교수이자 화단 후배인 황영성 화백의 인터뷰 중

    1977년에 광주에서 첫 서양화전문 상업화랑을 열었던 장상열 관장은 화상 입장에서 그분을 자주 찾아뵙고 작품을 받아다 전시도 하고 거래를 했었다 한다. 당시에 화랑가 최고의 작가였는데, 서울의 유명 화랑 주인들도 광주에 내려와 하룻밤 자면서 현금을 준비해 찾아뵙고 간곡히 그림을 청하면 작품을 파는 것에 큰 관심이 없으셨기 때문에 겨우 후에 한 두점 받아가곤 했다. 원래 사진기자 출신이지만 작품을 얻는 게 주목적이라 사진을 촬영하거나 다른 헛갈리는 일을 할 생각을 못하고 예를 다해 모셨는데, 젊은 친구가 화랑을 한다고 대견해 하시며 동사무소 서류 떼는 거나 난로고치는 일 같은 소소한 심부름을 부탁하시기도 했다. 94년에 서울에서 오 화백 전시회를 마련했는데 빌려다 건 작품까지 전 작품이 판매될 정도였다. 그런 분이 광주에 계심으로써 많은 후학들에게 영감도 주고 어떤 긍지나 격려가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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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예술의 거리에서 1977년부터 서양화 전문 현대화랑을 운영했던 장장열 관장의 인터뷰 중

    영상촬영은 마다하여 녹취록으로 자료집에만 실리게 될 강연균 화백도 대학에서 직접 지도를 받았던 건 아니지만 워낙 존경하는 큰 어른이었고, 같은 조선대 부고 미술부 선배인 오승윤 화백과 함께 종종 지산동 댁에 들르곤 했었다. 늘 편하게 대해 주셨고 수채화를 가져가 보여드리면 좋아하셨다. 설을 공휴일에서 제외한 박정희 정부시절 세태나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축생들이라 표현하며 못마땅해 하셨다. 민족주의나 민족미술을 특별히 강조해서 말씀하지는 않았지만 무조건 형체만 닮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주는 느낌과 의미, , 그런 주관적인 요소를 강조하셨다. 79년에 신장이 좋지 않아 한쪽을 떼어내는 수술을 앞두고 찾아뵙고 말씀드렸더니 불같이 화를 내시며 내가 그런다고 절대로 원래 있던 것을 떼어내면 안된다고 전하라 하셨다. 선배의사를 통해 그 말을 전달해서 결국 수술시간은 길어졌지만 신장 두 개를 그대로 보전할 수 있었고 이후에도 단식요법을 권하셨는데 그 정도로 그분은 자연주의자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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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시절부터 만남을 가졌던 오지호 화백을 회상하는 강연균 화백의 인터뷰 중

    인터뷰 영상은 15분에서 25분 정도 분량들인데, 전체를 들어보면 오지호 화백의 예술세계는 물론 그분의 삶과 정신, 당대 미술계나 후배들에게 미친 유무형의 영향과 인물사적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새삼 다시 생각하게 한다.

    - 요약정리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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