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호 회화의 빛과 색채' ; 사흘간의 길 위의 인문학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39.♡.28.230) 작성일19-11-01 14:12 조회2,071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오지호 회화의 빛과 색채' ; 사흘간의 길 위의 인문학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목포시립도서관이 기획한 ‘길 위의 인문학’에 인연이 닿아 목포 분들과 함께 이틀간의 강의와 사흘째 날 현장탐방을 진행했다. 도서관에서 내 건 ‘격변의 시대를 이끈 남도 예술가들의 삶에서 길을 찾다’라는 대주제에서 3차 강연프로그램으로 ‘빛과 색채의 화가 오지호’편을 내가 맡았다.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회화세계나 예술론이나 사회활동 등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오지호 화백의 예술세계를 살펴보자는 기획이다. 강좌를 의뢰받고 오지호 화백의 예술세계를 전후좌우 맥락 속에서 들여다보는 것으로 강의를 구성했다. 10월 29일 첫 날에는 ‘동서미술에서 자연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제목으로 삼고 서양과 동양의 고대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자연’이라는 소재의 재현과 표현의 관점들을 살폈다. 자연이 주체가 되고 화자도 그와 일체가 되고자 한 ‘산수화’와, 펼쳐진 풍경인 자연을 객관 대상으로 바라보는 ‘풍경화’의 관점, 재현에서 표현으로 옮겨가는 회화의 흐름에 주된 초점을 두었다. 30일 이틀째는 ‘한국 근·현대미술에서 오지호와 자연주의 구상회화’로 근대기 서양화 유입시기부터 오지호 화백의 생애와 시기별 작품들을 살폈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의 융합이다. 그것은 光을 통하여본 생명이요 光에 의하여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태양에의 환희의 표현이 곧 회화이다. 회화예술은 자연재현만이 유일절대의 방법론이다. 만일, 회화가 자연재현을 떠날 때 그것은 벌써 회화가 아니다.”라며 극단적으로 “비구상회화는 20세기 기계문명시대가 만들어낸 장식미술인 추상미술이 최종 도달처에 이른 것이다.”고 주장했던 회화관을 바탕에 둔 것이었다. 일본 외광파에서 이어지는 향토적 서정주의나 당대미술 흐름과는 시대착오적인 옛 서구 고전주의 양식을 뒤따르는 구상회화들, 그런 화단풍토나 오지호 화백의 구상주의 회화론과는 정면으로 부딪히는 강용운 화백의 “예술이란 과거의 답습에서 벗어나 시대감각에 맞춰 자기세계로 이끄는 전위이어야 한다. 복잡한 현실과 불안한 시대를 극복하는데 무가치한 아카데미즘으로써 자연주의보다는 외부의 물질관계를 무시함으로써 차라리 새로운 차원의 리얼리티를 획득하려 한다.”는 생각과 맞선 오화백의 생명의 자태로서 약동하는 자연을 감흥으로 담아낸 회화들을 비교해서 소개하였다. 사흘째이자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에는 오지호 화백의 자취를 현장에서 음미하는 탐방이었다. 화순 동복면 독상리에 목포에서 올라오는 그분들보다 한 시간여 앞서 도착해 현지의 상황들을 미리 점검해 두고 11시 무렵에 30여명의 일행을 맡아 일정을 시작했다. 2005년 개관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는 오지호기념관에서 비록 사진 복제품들이긴 하지만 강의 중에 슬라이드로 봤던 작품들을 실제 크기로 감상하고, 오화백의 저술들과 오승우·오승윤 두 아들과 그 아래 손자대까지 이어지는 미술가 집안의 대물림을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에 새로워들 하였다. 기념관 옆 길안내 표시를 따라 시멘트 울퉁불퉁 발라진 골목길로 2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생가를 찾았다. 넝쿨풀들 정겹게 들어붙은 돌담길 입구에 증조부 오연수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는 출입을 막기 위해서인지 탈곡이 끝난 콩대들을 문 앞에 쌓아놓아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百行之原 人子兩(?)止’라고 돌담에 기와로 박아놓은 글자가 무슨 말일지 나이 드신 분들이 머리를 맞대고 스마트폰 검색도 해보지만 정보가 없어 ‘인간이라면 백행의 근원인 효를 멈추면 안된다.’는 뜻으로 이해하자고들 합의(?)하였다. 문화재청이 지정한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74호’ 동판표식이 붙은 오지호화백의 생가는 1800년경에 6대조 호군공이 초가로 지어 대대로 살던 집이다. 동복 대지주의 집치고는 소박한 대나무 사립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을 낀 一자형 사랑채가 정면으로 마주한다. 각진 기둥과 서까래들에 유리창문을 낸 개량형 한옥이다. 그 사랑채에 ‘長飮子三拾年稓(?)苦之室’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主人自書時癸丑九二’라는 글에서 주인인 장음자 오재영(오지호 화백의 부친)이 1913년 9월에 써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아치형 구조로 판재를 덧붙여 꾸몄는데, 기둥과 들보 사이 귀퉁이들에도 당초문 장식을 넣는 등 집을 개량할 당시에 시골 선비의 사랑채지만 신문화 요소들을 일부 가미한 흔적이 보인다. 수령이 이삼백년은 돼 보이는 은행나무 고목 아래를 지나 안채로 돌아들어서면 역시 간촐한 一자형 다섯 칸 집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각진 목재들로 기둥과 서까래 등의 부재를 삼고 특별한 꾸밈없이 옛 초가대신 시멘트 기와를 얹은 지붕도 두텁지 않은 소박한 살림집이다. 화순군에 기증한 뒤로 군에서 등록문화재를 관리하고 있다는데, 역시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 박물관의 박제된 유물들처럼 사람의 훈김이 없이 썰렁하다. 생가 사랑채에서 담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별채는 대문 밖 정려를 지나 골목 옆 인척집 대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1922년 18세 때 혼인을 한 오지호 부부를 위해 따로 나가 살도록 지어준 집이라 한다. 이집에서 부인 지양순 여사와 일본 유학가기 전 4~5년, 귀국 후 송도로 떠나기 4년, 송도에서 돌아와 광주로 나가 살기 전 3~4년을 기거했고, 틈틈이 그림도 그렸었다 한다. 문들이 모두 잠겨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지만 북편 지붕 중앙에서 독특하게 丁자형으로 공간을 덧달아 냈는데, 화실공간을 위한 구조가 아니었나 싶다. 생가보다는 작은 정면 5칸 집인데 역시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라 마른 먼지만 쌓이고 벌어진 지붕 틈도 보수가 필요한 상태다. 국화축제로 붐비는 화순읍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광주 지산동 오지호 가옥과 화실로 향했다. 대문 옆 화실 위로 뻗어 오른 감나무의 붉은 감들이 가을 정취를 더한다. 높직한 나무대문을 들어서면 언제나 그렇듯이 정갈하게 관리된 초가와 마당의 화단, 몇 그루의 나무들이 아담하게 둘러서 있다. 시어른이나 남편 오승윤 화백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집에 계속 기거하며 집안의 숨결을 보전하고 있는 이상실 여사께서 차분차분 이집의 이러저런 내력과 오화백과 가족의 일화들을 들려주셨다. 욕심 없이 특별한 꾸밈도 없이 아담하게 마련한 대문 옆 목조화실에서 오지호 화백과 그 뒤를 이어 활용했던 오승윤 화백의 자취를 느껴본다. 역시 북쪽 지붕 맡에 낸 천창들에 관심들이 많이 간다. 이 작은 공간에서 두 분의 수많은 명작들과 오지호화백의 집필작업들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귀한 문화공간이 아닐 수 없다. 맥문동 둘러진 화단이며, 옛날식 아궁이 부엌이며, 오붓한 장독대가 있는 뒤뜰이며, 모두가 오전에 들렀던 화순 생가의 사람 온기 빠진 보존공간들과 비교되어 자부이신 이상실 여사께 경의를 표하였다. 오지호 화백과의 정감어린 조우를 마치고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근대의 전통화가들’ 전시를 끝으로 사흘간의 일정을 마쳤다. 박물관 앞 노랗게 물들어오는 은행빛들이 오지호 화백의 추경 화폭들과 닮았다. -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화순 동복의 오지호 화백 생가와 젊은 시절 거처인 별채 생가 옆에 자리한 오지호 기념관 광주 지산동 오지호 가옥과 화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