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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으로 옮겨낸 5·18의 기억 ; 강연균 집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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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211.♡.68.157) 작성일19-11-15 20:35 조회2,0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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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으로 옮겨낸 5·18의 기억 ; 강연균 집담회

     

    원로화가 강연균 화백이 불혹을 맞던 805·18 때 직접 부딪히거나 경험했던 현장의 기억을 40여년 만에 그림으로 되살려내고, 그에 관한 회고를 공개 집담회 자리로 풀어냈다. <하늘과 땅 사이 5>라 이름붙인 7점의 드로잉은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왔던,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그 시기의 섬뜩하거나 충격적인 기억들로써 거친 묘법의 흑백 콩테로 그려졌다. 117() 오후 4시부터 1시간 이상 진행된 집담회에서 밝힌 그 기억의 요지를 옮겨본다.(메모가 된 일부만 요점을 풀어 적은 글이라 강화백의 표현과 약간 다를 수 있다)

    양동다리에서 마주친 계엄군

    517일 후배 양창렬과 고흥으로 야외스케치를 떠났다. 그러나 그날 세계 복싱챔피언 박찬희가 타이틀방어전에서 엄청 두들겨 맞고 패배해서 복싱을 좋아했던지라 크게 낙담을 한데다, 그날 김대중 등 민주인사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들로 마음이 심히 어수선했다. 그림도 안되고 해서 518일에 광주로 돌아오는데 이미 분위기가 상당히 심상치 않았다. 시내 화실에 화구를 갖다놓고 금남로로 나가보니 계엄군과 시위대가 밀고 밀리며 대치 중이었다. 그때 이미 보도블럭들은 다 깨지고 공중전화 부스들도 박살이 나있어 시내가 마치 폐허 같았다.

    519일 우제길 전시 오픈에 참석할 겸 광주 5·18을 외부에 알리고도 싶은 생각으로 서울로 가려고 택시를 타고 갈 때 양동다리 근처에서 마주친 계엄군의 눈빛이 정말 굶주린 늑대 같았다. 우제길 전시에 참석했다가 밤에 최쌍중 화실로 광주 지인들을 불러 광주상황을 전했다. 친구 지광준 소령이 영어를 좀 할 줄 알아서 밤에 NHK로 광주상황을 청취할 수 있었다. 이튿날 동아일보 기자이던 후배 이성부 시인을 찾아가 광주 얘기를 전했는데 그때 동료화가들이 모여들어 함께 얘기를 들었고, 나오려는데 어느 기자가 선생님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있잖습니까.” 했다. 중앙일보에도 들러 홍성중(?) 기자를 만났는데 똑같은 말을 했다.

    논에 처박힌 시민군 버스

    위험한데 뭐하러 지금 내려가느냐는 만류에 광주놈이 광주에 있어야지하며 520일 광주로 돌아오려는데 전화도 버스도 이미 운행이 정지된 상태였다. 방법을 찾다가 친구 박종수에게 돈을 빌려 전주로 와서 다시 차를 갈아타고 고창까지 내려와 택시로 담양까지 왔다. 그 때 고창에서 담양으로 오는 길목에서 처참하게 불탄 채 논에 처박힌 시민군의 버스(그레이하운드)를 목격했다. 운전미숙이었는지 어떤 상황이 일어났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담양에서 광주로 들어가는 차는 없었기 때문에 광주까지 걸어올 때 광주를 빠져나오는 시민들을 보았다. 우연히 딸기장사 한다는 청년과 함께 걷게 되었는데, 고개를 넘으려 할 때 공수부대원이 정지를 시키더니 광주는 왜 들어가느냐?”고 물었다. 순간 마침 갖고 있었던 중앙일보 전시초대장을 보여주며 서울에 전시회에 참석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니 중앙신문사 직인도 찍혀 있는 문서를 보고 통과시켜 주었다. 그런데 함께 걷던 딸기장사 청년이 못들어오고 있길래 다시 돌아가 나와 함께 오던 청년이라고 말을 해서 같이 광주로 들어오게 되었다.

    뚜껑이 열려있는 무명열사의 관

    두암동으로 가서 부친을 뵙고 당분간 절대 밖에 나돌아 다니지 말라는 신신 당부말씀을 듣고 바로 시내로는 못가고 신우아파트 집으로 돌아갔다. 523일 아침에 아내에게 김밥 좀 싸보라고 했더니 꽤 많은 양의 김밥을 달걀 삶은 것과 함께 주길래 자전거를 타고 시대로 나갔다. 도청으로 가보니 허기진 시민군들이 너도나도 김밥을 달라고들 했다. 거기서 관 뚜껑이 열려있는 두 세 개의 관을 봤는데 신원이 확인되기 전이라 열어놓은 상태라 했다. 당시는 무명열사라는 말도 없었는데 이번에 그림을 그려 제목을 붙일 때 전청배가 무명열사라고 하자고 했다.

    리어카에 시신을 싣고 지나가는 청년들

    527일 해질녘까지 도청 앞에 앉아 있을 때 회수했던 무기를 다시 나눠주었지만 나는 그때 총을 들지는 못했다. 솔직히 이제 어린 아들이며 가족들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날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다가 양동고개 넘어 신우아파트 옆 산에 앉아 홀로 오열을 했다. 그날 새벽 여성 시민군이 지금 빨리 도청으로 와달라는 가두방송을 하고 다녔지만, 그 방송을 듣고도 모포를 뒤집어 쓴채 잠을 청했던 비굴한 사람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새벽에 시내로 나가다가 두 청년이 리어카에 시신을 싣고 신우아파트 앞은 지나가는데 아무런 표정도 없어 보였다.

    시민군의 철모에 고인 붉은 비

    시내로 나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일 먼저 YWCA로 가봤다. 2층으로 올라가니 창문 옆에 널부러진 시민군의 철모에 반쯤 흥건히 채워진 붉은 피를 보았다. 그때 왠지 그 피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옆에는 먹다 남은 빵조각이 뒹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박용준이라는 신협에 근무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진은 지금까지 5·18 사진기록으로 보지 못했다.

    YWCA 앞 핏자국

    YWCA에서 나오면서 보니 벽에 튕겨 박혀있는 머리도 있고 핏물이 흘러있었다. 현관 밖으로 나오다보니 들어갈 때는 위를 보고 가느라 못 봤던 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오게 되어서 보게 됐는데, 현관에서 길까지 핏자국이 나 있었다. 피 흘리는 시민군이나 시신을 죽은 짐승처럼 질질 끌고 간 흔적이었다.

    총탄 자국이 난 충장로 우체국 우체통

    금남로에서는 군인들이 아침 일찍부터 바케스로 물을 길어다 도로를 청소하고 있었다. 도로에 난 핏자국들의 흔적을 지우는 중이었다. 충장로 앞 우체통은 수많은 총탄 자국들로 처연했다. 우체통의 일련번호에서 충장로 우체국 앞의 것이 늘 1번이었는데 총탄자국 때문에 새 것으로 교체되었다.

    나는 특별히 이념화 돼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이념이 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일상에서 보여지는 것들을 담담하게 그릴 뿐이다. 주변의 것들을 주로 그리다보니 사실적인 그림들이 된 것이다.

    - 정리 :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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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균 화백이 40여년 만에 기억 속의 5.18을 그림으로 옮겨낸 <하늘과 땅 사이 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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