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와 리얼리티 ; 강연균 화백 작업실 탐방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210.♡.209.214) 작성일18-06-26 19:13 조회2,659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심미와 리얼리티 ; 강연균 화백 작업실 탐방 광주비엔날레 작가스튜디오탐방 2018. 6. 20(수), 소태동 한옥작업실 광주비엔날레 재단이 월례행사로 진행하는 ‘작가스튜디오탐방’ 행사가 6월 20일 오후 3시 30분부터 원로 강연균 화백의 소태동 작업실에서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 민중미술작가, 재야미술인사이면서 누드화가, 석류화가 등 부르는 지칭들도 많지만 정작 작가는 민중미술이 무엇인지 지금도 모르겠고, 이념이나 의식이나 계획하고 그리는 것보다는 그리고 싶은 것, 그려야 할 것을 붓끝으로 옮겨내는데 충실할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60여년 가까운 화업 가운데 연작 형태로 묶을 수 있는 몇 가지 소재별로 주요작품들을 비엔날레 조인호 전문위원이 프레젠테이션으로 사진을 띄워 질문을 하면서 작가의 얘기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작품마다 다른 수채효과와 분위기를 내는 누드화들에 대해 “80년대 분노의 시기에 사실은 누드화에 빠졌었다. 그래서 더러는 강연균은 그런 시대에 누드화나 그리고 있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억압되고 답답한 시절에 누드화는 아침 이슬방울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화사하고 감미로운 누드화와 달리 70년대 말부터 세파와 인생사에 찌들린 주름진 노인·노파의 초상 연작이 대조를 이룬다. 어딘지 애잔한 주변의 서민들, 고향의 어머니 같은 인물이 주는 느낌을 현실감 있게 그린 것들이다. 1989년작 <시장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작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진을 찍어와서 화폭에 인물들을 배치하고 필요한 소품들을 곁들여 장터의 분위기와 사람들 모습을 그려내었다. 1982년에 <고부가는 길>을 처음 그렸는데, 어려서 조부를 뵈러 그 길을 지날 때마다 형으로부터 들었던 동학혁명 등의 역사적 의미와 상황을 그리고 싶었다. 이 고부길 그림이 작품에서 우리 땅에 대한 애정을 더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개 어떤 풍경을 그릴지 먼저 정하고 찾기보다는 지나가다 눈에 들어오는 하잘 것 없고 이름 없는 것들에 정이 가서 그림으로 담곤 한다. <황토언덕>(1984) <전라도 땅>(1990)처럼 무너져 내리고 파여지거나 황토빛 생생한 시골의 풍경들을 즐겨 그리곤 했다. 1993년의 <조국산하도>는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솔직히 팔기 위해서 주문을 받고 그린 것이다. 제주도 성산일출봉에서 무등산·설악산·금강산·백두산 천지까지 조국산천을 폭 4m 정도의 대작으로 그렸는데 유은학원 학교현관에 걸렸었다 한다. 1979년에 그린 <장군의 초상>은 야밤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두 대머리 인물이 주인공인데, 당시 군부의 움직임이나 시국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기운을 느껴서 그린 것이다. <폐선>은 80년 5월에 선박자재들이 나뒹구는 조선소 풍경을 그린 것이고, 스산한 겨울 <탄광촌> 풍경도 그해 시대분위기로 그렸다. 5·18의 참상과 분노, 저항감을 담은 <하늘과 땅 사이> 연작은 시국관련 화가의 시대적 발언이다. 첫 작품을 80년에 시작했으나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다 이듬해 81년에 겨우 완성했다. 82년에 신세계갤러리에서 200호 초대전이 있었는데, 어느 날 경찰인 듯 한 자가 다가와 무슨 작품이냐고 묻길래 때가 때인지라 겁도 나고 해서 지구에 핵전쟁이 났을 때 상황을 상상해서 그린 거라고 대답했었다. 이 <하늘과 땅사이> 연작 중 세 번째인 1990년 작품은 여전히 미해결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결국 5·18 광주정신이 승리한다는 걸 상징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해골 아래 양쪽으로 갈라진 다른 배경으로 남북 분단상황을 암시하고, 그 위 해골에 올라선 누드의 남녀가 팔을 뻗어 올려 승리를 외치는 구성이다. 1995년 망월동에 설치한 <하늘과 땅 사이 IV>는 이 연작의 최절정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민예총 각 지역별 지부에 천을 보내면 자유롭게 시국관련 발언들을 써서 보내오고, 많은 분들이 금남로 작업실에 직접 들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이 1,200여장의 만장을 망월동 묘역까지 4km 길을 따라 줄지어 세우고 광목으로 연결하여 묘역 입구 앞에 꽃상여를 높이 띄워 올려 영령들의 위령과 천도를 상징화했다. 2012년작 <다카끼 마사오와 장준하>는 동시대를 살았던 두 남자의 다른 삶을 그린 것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치열한 선거전 속에서 박정희 딸 박근혜가 후보로 당선될 것 같은 분위기여서 안되겠다 싶어 이 그림을 그렸다. 같은 일본군 장교였으나 한사람은 혈서로써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한사람은 거기서 빠져나와 독립군이 되어 조국을 위해 활동했던 너무나 대조적인 삶을 비교시키고 싶었다. 신문에서 본 장준하 유골 발굴사진에서 두개골 함몰부분을 강조해서 일본군복 차림의 다카끼 마사오와 나란히 두 폭으로 그렸고, 민족문제연구소의 기획으로 부산 등 몇 군데 순회전을 통해 소개되었다. 드로잉 중에 2017년 턱을 괸 노인을 그린 것은 가끔씩 일을 도와주러 오는 후배지만 노인인데, 너무나 척척하게 사는 사람이다. 한 달에 삼사십만원 지원금으로 사는데 혼자 살면 지원이 더 많다 해서 부인과 이혼해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을 계속 스케치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 제대로 그려보려고 한다. 목을 꺾고 눈물을 흘리는 인물그림은 누구에게나 비통함도 있고 그런 거다. 검은 천에 여물통을 올려놓은 설치작품 <빈배>도 별것은 아닌데 사진효과가 훨씬 크다. 근래에 드로잉을 많이 하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