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웅의 예술후원정신 책으로 출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210.♡.209.115) 작성일13-03-14 19:59 조회10,559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하정웅의 예술후원정신 책으로 출간 [원로에게 듣는 예술경영 - Pre Story] 예술경영지원센터 광주에서 하정웅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은 특별한 존재다. 그의 다섯 차례에 걸쳐 기증한 2,300여점의 작품들이 광주시립미술관 개관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도 미술관의 가장 큰 운영자산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민간차원의 메세나 정신을 온 사회에 널리 전파한 모범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대학교, 영암 등지에도 대량의 작품들을 기증하여 지역 미술문화를 진흥시키고, 시각장애인들에게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하정웅 선생의 인생과 정신을 보다 소상히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 출판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지원센터가 펴내 최근 배포한 [원로에게 듣는 예술경영 - Pre Story]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기도의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하정웅 선생의 생활철학과, 그 규모와 다양성 면에서 국제적 콜렉터라 할 정도로 엄청난 - 특히 재일교포는 물론 한국의 현대미술을 대변하는 주요 작가들의 작품수집과 대량기증의 이면에 스스로 지켜오고 있는 예술후원정신, 광산촌 재일교포의 2세로 성장과정부터 중학교와 공업고등학교 미술부 시절에 키웠던 화가의 꿈을 접고 전자제품 판매점을 거쳐 부동산을 기반으로 한 성공한 사업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생역정 등이 담겨 있다. 책의 내용은 하정웅 선생과 미술사가 조인호 (광주비엔날레 정책연구실장)의 인터뷰(2012. 11.20, 홀리데이인광주 라운지)를 정리한 대화체 형식이다. 하정웅 선생의 얘기 중에서 주요부분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그림으로 성장기 자신감 자부심 키워 내게는 이것이 중요하고 이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런 우선 순위는 없어요. 지금, 오늘, 이 순간에 어떤 요구가 나오면 그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되는 거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곧잘 그렸어요. 그림으로는 조센징이라는 차별 없이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그림으로 내가 우등생이라는 자부심이 생겼고 그림이 내게 힘을 줬어요. 중학교 때 일본인 미술선생님이 그림도구도 사주고 나를 도와주고 키워줬어요. 조선인이지만 중학교 전교 생도회장 선거 때 후보 세 명이 나왔는데 내가 92%를 받았어요. 중학교 때는 육상부를 만들어 부장도 했고요. 아키타 공업고등학교에 미술부가 없어 기계도 새 시대 와서 뉴디자인이나 새로운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건의해서 미술부를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아키타에 8개 고등학교 미술연맹을 만들고 회장을 해서 연맹 전람회를 아키타 시내에서 개최했어요. 집안은 못 살고 아주 곤란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었지요. 미술세계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요. 그 사람의 개성을 잘 보는 눈이 있어야 해요. 나는 수집하면서 계속 작가연구를 해요. 작가의 인격이나, 인간성이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나 이런 것을 먼저 연구해요. 특별히 미술학교를 간 것도 아니고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에요. 초등학교부터 내 안에서 그런 세계가 커지면서 예술세계를 배웠던 거지요. 작품수집 계기와 일화 내가 작품수집을 시작한 동기는 어릴 때부터 살던 아키타의 집이 일본초가집이었어요. 초가집만 그리는 유명한 무카이 주니치의 초가집 그림을 사고 싶어 신문광고가 나서 쫓아갔는데, 그 초가집 그림 옆에 미륵보살이 있었어요. 전화황 작품인데, 그때 처음 교포를 알았지요. 그래서 초가집은 안 사고 미륵보살을 사버렸어요. 그 뒤에 교토에 살던 전화황 선생 집을 찾아갔어요. 교토역에 내렸는데 비가 바케스통으로 쏟아 붓듯 내렸어요. 전화황씨가 돈이 없기 때문에 집짓기 안 좋은데다 혼자 집을 지어서 집안이 완전 홍수가 났어요. 그림도 물에 다 젖은 걸 보니 아! 내가 이 사람을 몰라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작품이 우리 민족의 역사이고 기록이고 증언 아닌가? 이걸 내가 모른 체하면 다 쓰레기가 되겠구나 싶었죠. 내가 살았던 아키타 지역이 식민지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력발전소 만드는 일에 강제노동으로 많이 동원됐어요. 눈이 많이 오고 춥고 영양부족에 병이 나거나, 공사 중 사고도 많아서 돌아가신 분들이 계셨어요. 그분들은 이름도 없이 묻혔어요. 우리 집 뒤 그분들 산소에 둥근 자연석이 하나 있는데, 이름도 없는 무연고 무덤이었죠. 우리 어머니는 명절이나 음식을 만들면 그 산소에 가져가라고 내게 시켰어요. 그런데 ’80년대에 이우환씨 작품을 미술지에서 봤는데, 바로 무연고 위령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림을 모아서 기도를 올리는 성당, 불교사찰 같은 성격의 기도의 미술관을 아키다 고향에 만들려고 맘먹게 됐지요. 설계도 하고 수집도 하고 땅도 사고 준비를 했지요. 그러던 중에 한일회담이 열려 수교를 하게 됐는데, 강제노동이나 위안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들에 대한 정부의 배상도 잘 안 되면서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어그러졌어요. 그런 문제 때문에 아키타시에서 겁이 나서 물러나고 말았어요. 그래서 작품들이 갈 데가 없어져서 내가 가지고 있게 된 거요. 광주시립미술관 작품기증 광주시립미술관이 ’92년도에 만들어지고 ’93년에 내가 광주에 왔는데, 오승윤씨가 같이 시립미술관에 가자고 했어요. 가는 길에 수집한 작품 한 두 점을 미술관에 기증해주면 어떻겠냐고 해서 세 점을 주겠다고 했어요. 관장을 만나 얘기 중에 다섯 점 기증 얘기가 나와서 그러기로 했어요. 전시장을 보여준다 해서 갔는데, 작품이 없어서 문을 모두 닫아놓았더라고요. 관장이 백평짜리 방을 보여주면서 작품을 기증해주면 좋겠다고 그래요. 기증하겠다는 말은 안하고 집으로 작품을 보러 오라고 했어요. 오승윤, 임병성, 미술관장 셋이서 일본 우리 집을 찾아왔어요. 그때 시립미술관은 광주작가들에게 작품기증을 받고, 전국을 돌아다녀도 150점 밖에 안 돼서 전시를 못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재일교포 작품 222점을 기증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안 도와주면 미술관이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시작이 돼서 금년 다섯 번째까지 모두 2,300여점을 줬어요. 이번에 이우환씨 작품도 새로 추가했잖아요. 그때 차종갑 미술관장과 강영기 시장이 광주가 시립미술관을 만들기는 했는데 이런 상태이니 도와주세요, 키워주세요, 광주를 사랑해주세요 라고 나한테 세 가지 말을 했어요. 시장님과 관장님이 내게 광주를 사랑해 달라고 호소하는 말을 듣고 도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 이 순간까지 계속 이일을 해왔어요. 내가 특별한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큰 기업가도 아닌데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분들이 나를 믿었어요. 나에게 그런 사명을 준 거요. 내가 도와준다, 내가 사랑하겠다 하고 시작한 거요. 인간적인 존재감. 그런 걸 갖고 있어요. 예술이란 인생의 미학 예술이 사람을 만드는 것. 하나의 정신을 갖고 세계를 갖고 인간이 되는 그런 것이 그 안에 있는 거요. 만약 내가 예술세계를 몰랐다면 어디서도 그런 긍지를 못 얻었겠지요. 나는 한 번도 남한테 날 도와주세요, 키워주세요, 사랑해주세요 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배가 고파 영양실조에 걸려 시력을 잃을 뻔한 적도 있어요. 학교도 못갈 형편이었는데, 내가 열심히 해서 부모님이 고등학교까지 보내줬잖아요. 그게 전부 인간의 미학이고, 인생의 미학이고, 예술입니다. 사람 자체가 예술이고 사람의 정신 자체가 예술이고, 살아온 정신이나 철학이 예술이고 미학인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라는 것은 작가를 잘 연구해야 해요. 그 사람의 인격, 인간성, 그런 것을 잘 봐야 돼요. 인간성이 없으면 예술가로 적합하지가 않아요. 내가 처음으로 맹인복지를 도와줄 때 옆에서 나쁜 말만 해요. 사기꾼같이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처럼 해서 맹인들을 이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고. 재일교포 문세광 저격사건도 있어서 이 사람이 조총련과 이어진 것은 아닌가. 사업가가 이름 팔아먹고 명예 얻고 자랑하고 싶어서 하는 것 아닌가, 재일교포가 쓰레기 같은 작품을 가지고 와서 기증했다고도 하고.. 그래도 나는 일체 관계 없이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내게는 도와 달라, 사랑해 주라, 키워 달라, 그 말이 전부요. 하정웅 미술관은 만들지 않는다 (다양한 미술작품을 여러 지역에 나눠주기보다 미술관을 제대로 지어서 종합적으로 작품관리도 하고 수장도 하고...) 그러실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광주에서 받아주면 제일 좋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문화재단을 만들면 운영비용을 계속 내야 해요. 사람들은 일을 하다 가버리면 그만이에요. 공공기관은 도망가지는 안잖아요? 기증받은 미술관들이 자체적으로 알아서 발전도 시키고 그랬으면 해요. 씨는 내가 뿌려주고 꽃은 각자 스스로 피우라는 거지요. 나는 메세나 정신으로서 후원, 지원만 해주는 거지요. 이우환씨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아키타에 미술관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던 얘기를 이우환씨가 듣고는 내게 절대로 개인미술관을 만들면 안 된다고 했어요. 또 절대 자기 이름을 붙여서 하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영암 ‘하 미술관’도 영암에서 자기들이 붙인 것이에요. 하미술관에 조각작품을 하나 만들었어요. 돌로 만든 ‘미완의 문’이에요. 내가 모자란 것, 내가 못한 것... 사람들 하는 일은 전부 미숙하고 미완의 일들이요. 이 미술관도 미완이고 모자란 곳이 많다. 그러니 이후 내가 없더라도, 사람들이 좋은 마음을 모아서 이 미술관을 완벽하게 만들어 세계 만국에 이런 미술관이 있다는 걸 알리고,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게 해달라는 유언의 마음으로 만들었어요. 나는 20년, 30년 전부터 열심히 씨를 뿌렸어요. 사람들이 씨 이름이 뭔지도 몰랐어요. 꽃만 아름답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실이 나와야죠. 과실을 먹고 그 맛을 알아야하는데, 그 건 아직 멀었어요. 전에는 쓰레기 같은 작품이다 뭐다 해서 내 인격을 죽이고 했지만 꼭 과일이 나올 거요. 이 미완이 예술이요 예술철학이에요. 아무 의미 없이 작품을 기증하지 않아요. 영암 하미술관 후원 영암군수가 부모님 고향이 영암인데 뭣 때문에 광주만 작품을 주고 영암엔 안주느냐고 해요. 사실은 나도 영암에서 그런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어요. 군에서 미술관 부지를 보여줬는데, 구림마을을 택했어요. 왕인박사와 일본과의 역사현장이기도 하고 아주 중요한 문화마을이잖아요. 원래는 부지가 천 평 정도밖에 안 돼 주변 민가들을 사들여 두 배정도 넓혔어요. 처음에 미술관 만들 때 군의회에서 계속 부결되다 네 번째에 결정됐는데 군수도 노력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창작관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준비하고 있어요. 예술가가 오면 머무르며 작업도 하고, 학술대회도 할 수 있고, 그런 다목적인 시설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장애인복지 후원 전화황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광주에 ’80년도부터 들어왔어요. 광주 전람회 때 몸이 너무 피곤해서 맹인에게 마사지를 받았는데, 그 맹인이 광주에 2,000여명의 맹인들이 있는데 모임장소도 없고, 협회도, 조직도 없으니 도와달라고 말했어요. 벌써 10년 전부터 기관을 찾아 갔는데, 한 번도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선 당신들의 자립의지와 결심을 보여주라고 했어요. 일년간 200만원을 모아보라고 했지요. 그런데 정말 이 사람들이 1년 안에 200만원 모았다고 전화가 왔어요. 대단하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 맹인들과 인연이 이어진 거요. ‘확신범’과 ‘심검’, ‘노당당’의 정신 ‘확신범’(確信犯)이라는 말 알아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은 무서운 것이 없어요. 죽인다고 해도 죽여보라고 하는 거요. 선생님이 중학교 졸업 때 통신문에 “지금부터 사회에 나가면 여러 가지 고생이 많을 것이다. 어떤 고생이 있어도 사람을 위해, 이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써줬어요. 그것이 내 스타트 정신이요. 사람들은 나를 평가할 때 껍데기만 보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골수에까지 사명감이 있어요. 사명이 있으면 죽인다고 해도 안 죽어요. 사실 그런 일은 학예사가 해야 해요. 인간을 연구해야죠. 인간을 모르면 학예사가 아니에요. 골수 안에 있는 피를 연구하라는 말이죠. 사람들이 처음에 나에게 광주에 가지 말라, 기부도 하지 말라고 100% 반대했어요. 우리 가족도 반대하고. 그런데 나는 결정을 한 후로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어요. 이게 확신범의 정신이요. 도갑사 대웅전 바로 옆에 심검당(尋劍堂)이 있는데, 옛 건물을 새롭게 지은 건데 그 현판을 나에게 써주라고 했어요. 심검당의 의미는 스님도, 불교 신도도, 일반인도 누구도 자연스럽게 이 방에 들어와서 자기 마음과 대화를 하고, 살아왔던 길을 성찰도 하고, 사람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으라는 그런 방이죠. 수련을 하면서 자기 목에 칼을 대고 하라는 의미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목숨을 바치고 생각하라는 의미가 있는 곳이요. 그 글씨를 나에게 쓰라고 한 거요. 스님들이 내 행위, 살아온 길을 보고 요청을 한 거지요.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말인데. ‘노당당’(露堂堂)이라는 말, 정정당당이라는 말이지요. 불교의 정신세계가 높은 선(禪)의 세계에서 여기서 나온 말인데,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그 사람이 걸었던 길, 그 사람이 했던 말, 행동 하나하나가 마지막에 거짓 없이 그대로, 일생 해왔던 대로 반드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노당당하게, 바르게 살아야한다, 이것이 내 해왔던 일의 근본정신이요. - 인터뷰 / 요약정리 조인호 하정웅 선생은 1939년 일본에서 재일 이주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하고 소질을 인정받았지만 빈곤한 가정형편 때문에 화가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기술자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뎠고, 1963년 결혼 후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되면서 탁월한 사업능력과 전후(戰後) 일본의 경제성장이 맞물려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의 어느 전시회에서 재일교포 화가 전화황의 <미륵보살(彌勒菩薩)> 작품을 처음 본 순간,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다정함과 온화함과 함께 부처에 의해 구제받을 수 있는 세계를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기도하는 정신이야말로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수단이라 생각하고 ‘기도의 정신’이 깃든 미술작품을 수집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재일교포의 작품을 비롯한 인간의 수난과 고통, 인류애적 희망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수집해 왔다. 그 콜렉션을 바탕으로 일본 타자와코(田澤湖)에 ‘기도의 미술관’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당시 한일관계에 영향받은 지방정부의 불허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때마침 고국 광주에 시립미술관이 건립되고 작품 기증을 희망하는 의사타진이 있었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 및 광주와의 인연을 생각하고 1993년 처음 212점을 기증해 주었다. 이후에도 그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미술현장에서 작품을 수집하며 컬렉션의 질과 양을 늘려나갔고, 1999년에는 2차로 광주시립미술관에 471점을 기증하였다. 광주시립미술관이 그의 컬렉션의 바탕인 평화와 기도의 정신과 가장 부합한다고 생각하고, 2003년 7월에 3차 1,182점 기증, 2010년 7월에 4차로 357점을 추가 기증하였다. 거기에 올해 이우환 전시회를 계기로 이우환씨 신작 18점을 포함한 80점을 기증하여 광주시립미술관만 해도 하정웅콜렉션 작품은 총 2,300여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부산ㆍ대전ㆍ울산ㆍ포항 등 도처의 미술관에 수십 점에서 수백 점씩의 작품을 기증하여 한국의 미술문화 자산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메세나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하정웅컬렉션은 "기도(祈禱)의 정신"을 담고 있다. 평화의 기도, 마음의 평안을 바라는 기도, 희생된 사람들이나 학대받은 사람들, 사회적 약자,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수난받다 사라진 사람들을 위한 인간의 아픔으로서의 기도라고 말한다. 재일교포로서 고국에 대한 뿌리의식과 인간애를 바탕으로 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을 문화를 키우고 가꾸며 나누는 기도의 메세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