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농사꾼 박문종 작가와의 대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61.♡.217.81) 작성일24-11-25 10:40 조회354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11월 23일 오후 의재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진행된 박문종 작가와의 대화 그림농사꾼 박문종 작가와의 대화 1970년대 수업기부터 최근까지 작업 흐름과 생각 등 얘기 의재미술상 수상작가인 박문종 초대전 행사의 하나로 11월 23일 오후 의재미술관 세미나실에서 작가와의 대화 프로그램이 있었다. 박문종 작가와 미술사가인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의 대담과 참석자들의 질문 답변으로 2시간여 동안 진행되었다. 주요 얘기를 아래에 간추려 보았다. 1978년 전남일보에서 연진미술원 개원 소식을 보고 연진미술원을 찾았다. 당시는 목포와 진도, 광주가 호남화단의 삼각축으로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5‧18무렵 무기력감에 빠져 있다가 산수 대신 인물화 먹그림을 주로 그리게 되었다. 강고한 먹선에 의한 갈필의 먹그림이 좋아 보였다. 90년대 들어 긴장이 풀린 문화환경과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영향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러면서 점차 종이와 먹과 흙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과 반대로 가보자는 생각을 했다. 소재도 주로 농촌을 선택해서 경작과 농경도 개념을 많이 그려왔다. 석사 논문으로 ‘조선시대 농경도 연구’를 했던 것이 도움이 많이 됐다. 밭이 아닌 논을 선택한 것은 논이 남성적 공간이고 가부장 시절의 남성성, 권력, 권위와 관련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안과 가까운 목포의 남농 화맥이 아닌 광주의 의재 화맥을 잇는 연진미술원을 택하게 된 배경이 있는지? 1977년에 목포에서 남농 제자분에게 1년 정도 공부를 했었다. 기초 화업을 습득하는 게 좀 빠른 편이었고 먹맛을 아는 정도가 됐다. 남농이 기교파라면 의재는 정통파여서 두 분이 전혀 성향이 달랐다. 연진미술원 개원 소식을 듣고 따불백같은데다 짐을 잔뜩 쑤셔 넣어 짊어지고 연진미술원에 등록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됐다. 연진미술원 수업과정이나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수업과정은 기초수련을 위주로 매우 엄격한 수업체제였다. 난을 칠 때도 탁구할 때 손동작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팔을 크게 움직여 선을 긋도록 반복 연습을 되풀이 했다. 당시는 공모전에 출품하는게 중요했는데, 그런 동료들 간의 경쟁구조가 싫었다. 어느날 [전남도전] 심사에 다녀온 선생님이 입선자들 얘기를 하는데 내 이름은 언급되지 않아 몹시 실망이 되었다. 홧김에 술 한잔 먹고 와 실기실에 있던 접시 쌓아 놓은 걸 밀쳐 다 깨트려버렸다가 미술원을 쫒겨날 뻔한 걸 다행히 모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특선이었다. 연진미술원 수료 후 1980년대 전반까지 그 사이 작품활동은 어땠는지? 연진미술원 수료 후 기숙사에서 나와 5년 정도 증심사 아래서 방을 얻어 자취를 했다. 그러다 어떤 분이 거처를 제공해 준다고 그림만 그리라고 해 그리로 옮겼는데 알고 보니 산수 잘그리는 사람 화조 잘 그리는 사람 등등을 모아 놓은 그림공장 같은 곳이었다. 이튿날 바로 짐을 싸서 나와 여관을 전전하다 호남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대학은 이거 저것 배우는 것도 있지만 어쨌튼 잘 갔다고 본다. 1980년대 후반 들어 이전 전통적인 작업과는 전혀 다른 현실참여적이고 시대풍자적인 민중미술 쪽으로 변하게 되는데, 광주미술인공동체 회원으로 ‘오월전’에도 1989년부터 94년까지 참여하다 이후 함께 하지 않았는데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1980년을 거치면서 굉장히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있다가 산수 대신 인물을 많이 그리게 됐다. 당시 광미공의 작업방식이 이른바 집체화, 공동작업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어떤 사안에 대해 개별적 해석이나 작업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월전’ 준비로 내게 주어진 주제가 ‘미문화원 방화사건’이었는데 이걸 그림으로 풀어내는 작업에 상당히 어려움을 느꼈었다. 1990년대 들어 기존 수묵 작업에 흙물과 흙이 들어오게 되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박문종 회화에서 먹과 흙은 어떤 상관성을 갖는지? 어렸을 때부터 친숙했던 흙냄새, 흙의 느낌이 좋았다. 시골집에 농사에 쓰려고 모아둔 황토를 가져다 흙물작업을 해봤다. 흙물을 염료로 쓰던 옛 전통도 있어 종이에도 통할 거 같았다. 흙은 변치 않는 광물이다. 1990년 91년에 흙물작업을 해서 93년 서울 금호갤러리 개인전 때 처음 발표를 했었다. 모든 것이 타고나면 재가되고 그 재로 먹을 만들고, 무엇이든 썩으면 흙이 되지만 그 흙은 생명을 틔워내는 모태같은 것이어서 소멸과 생성이라는 관계로 먹과 흙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002년 무렵 논둑에 한지를 두르고 모내기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는데 모내기와 그림그리기의 관계는? 90년대부터 농사그림을 10여년 했지만 만족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놀이개념으로 일종의 농사놀이를 해봤다. 흙물이 화선지에 튀어 만들어지는 효과도 재미있었다. 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수확은 화실에서 하는 셈이었다. 2002년 2008년 두차례 광주비엔날레 참여 때 볏짚묶음이나 홍어 거시기를 실리콘으로 뜬 걸로 설치작업을 하는 등 필묵회화와 다른 파격을 시도했는데, 주된 의도는? 시골에서 많이 보는 볏짚을 작업에 활용해 보고 싶어 많이 모았었다. 이걸 비엔날레에 피라미드처럼 높이 쌓아볼까 생각도 했었다. 홍어는 누구나 좋아하고 만만하게 여기는데, 만만한 약자나 전라도사람을 빗대어 홍어X라고 한다. 우리나라와 대척점에 있는 칠레산 홍어가 어떻게 여기 입맛에 맞는가 싶기도 했다. 2015년 개인전 때 ‘땅에 연애 걸다’, 2022년에는 ‘나는 논에서 났다’라는 제목을 붙이고 작품에도 써넣는데 어떤 의미인지? 모를 심는 작업은 인간과 자연의 접촉, 감촉이 일어난다. 일종의 생산활동이다. 모를 심으려면 땅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데 이것은 기계적인 것과는 다르다. 경작지를 일구고, 열지어 모를 심는 게 마치 노트에 글씨를 쓰는 것과도 같다. 그림에 논표시로 그려넣는 기호는 논과 인물과 모나 풀을 상징하는 압축이다. 향토사단에서 군생활 때 사경도 작업을 자주 했었다. 현장답사를 해서 지형도나 마을지도를 그리는 건데 그때 논표시 기호를 내 그림에 사용한 거다. 이번 전시작품 중 대형 걸게그림 <무등산>에서 주로 담아내고 싶었던 것은? 어린이들 수업 때 밖에다 넓은 종이를 깔아놓고 그림그리기 없이 점만 찍기를 했다. 잘 안 보이겠지만 춘설헌도 그려져 있다. 춘설헌에서 반년 정도 살았었는데, 그때 그린 그림으로 [미술대전]에서 입선을 하기도 했다. 해놓고 보니 뒤에서 봐도 그림이고 작품에 볕이 드니 특별해 보인다. 먹과 흙으로 농사짓는 화가 박문종의 작업에서 앞으로 주안점을 두고 탐구해보고 싶은 것은? 나는 대체로 이미지를 양산하는 편인데, 이제 이걸 축약할 필요를 느낀다. 기호화된 작업들을 더 축약해 볼 생각이다. - 정리 : 광주미연 작가와의 대화 중인 박문종 박문종 <무등산>, 2024, 한지에 먹, 흙, 280x400cm 박문종 <춘설헌 1, 2, 3>, 2024, 한지에 먹, 흙 박문종 <땅을 두드리며 노래한다 1, 2>, 2024, 한지에 먹, 흙, 각 220x140cm 박문종 <난초가 미쳤다>, 2023, 한지에 먹, 호분, 74x143cm 박문종 <마을풍경 1>, 1994, 한지에 먹, 채색, 113x144cm 박문종 <군방도 8폭 병풍>, 1985, 한지에 채색, 166x360cm 박문종의 활동 자취를 보여주는 관련 자료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