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선리의 흙과 바람에서 도자기꽃이 피다 - 도예가 김문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1-09-21 09:12 조회5,846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月仙里의 흙과 바람에서 도자기꽃이 피다 도예가 김문호의 작품 세계 - 글 : 백은하 (소설가) 전남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예술인 마을’ 입구를 지나면 도예가 김문호의 작업장이 있다.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는 승달산 자락을 끼고 있어서 예로부터 분청 가마터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20여년 전 월선리에서, 꿈의 흙이라 불리는 붉은 황토 즉 ‘적토’(赤土)를 만났다. 월선리의 적토는 장석류가 많고, 사토질, 와목 성분도 들어 있어 점성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흙벽이 두껍고 불속에서 잘 갈라지지 않는다. 그는 월선리에 요장 ‘승광요’를 짓고 터를 잡았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1년 동안 손수 개인 작업장을 만들고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흙을 비롯한 모든 재료는 주변에 있다는 신념으로 찾고, 발견하고, 연구했다. 김문호의 고향은 목포다. 목포대학교 미술학과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스승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첫 스승은 군대를 제대한 후, 무안 몽탄에서 만난 이정헌 선생이다. 이정헌 선생으로부터 도예의 가장 기본인 물레질부터 배웠다. 최차란 선생으로부터는 도자기 보는 법을 배웠다. 물레에서 판 작업을 하게끔 지도해준 윤광조 선생으로부터는 작가로서 가야 할 방향을 제시받았다. 그는 세 분의 가르침을 그의 예술의 근간으로 삼았다. 도자기의 어머니는 불이다 김문호는 월선리에 정착한 후, 세상과의 시끄러운 대화를 잠시 접고, 월선리를 걷기 시작했다. 흙을 관찰하고 대나무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승들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자신만의 조형 세계가 필요했다. 그는 손으로 흙집을 짓고, 흙집 안에서 흙을 조물거리다 ‘토우’를 빚게 되었다. 비정형적인 아름다움. 너무 재미있었다. 그는 토우 작업에 빠져들었다. 어느날 가까이에 있던 ‘탑’과 ‘집’ 즉 ‘한옥’을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토우, 탑, 한옥을 빚게 되었다. 2003년 개인전에서는 ‘108개’ 탑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하나의 소재를 바탕으로 도자의 조형 어법으로 108개의 탑을 풀어냈다. ‘108탑’의 의미는 종교적인 차원의 해석보다는 우리 선조들의 문화유산 속에 녹아난 숨결을 해석한 것. 그는 탑을 홀수로 빚어 절제와 균형, 조화로 대표되는 기존 탑의 미학적 질서를 해체했다. 더러는 탑신부를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 이것도 탑이다. 이런 탑도 있구나.’ 라고 느낄 수 있게끔 하고 싶었다. 또한 한 층 한 층 쌓아올리는 일반적인 탑 쌓기 방식을 무시하고 덩어리째 탑을 쌓기도 했다. “저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케치를 해봤자, 불은 언제나 다른 형태의 도자기를 탄생시킵니다. 또한 저는 언제부턴가 불이 흙을 굽는 도구가 아니고, 흙과 어우러져 도자기라는 새로운 생명을 낳는 어미의 품으로 느껴집니다. 따라서 전 오직 흙을 빚어 판을 만들고 내 마음속에 담겨있는 형상을 도자기의 어머니인 불에게 맡길 따름입니다.” 김문호가 빚은 집은 모두 빈집이다. 문이 없이 커다랗게 나있는 구멍은 큰 입을 벌리고 소리 지르는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무엇이든 담아내는 사각 그릇 같기도 하다. 그의 집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깊고 넓은 집안으로 이끌고 들어와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한다. 그는 불과 우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도자의 미학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는 도자기를 통해 인간이 지닌 오감을 모두 끌어내고 싶어한다. 그래서 될수록 흙덩어리를 넓고 거칠게 사용한다. 거칠게 다뤄진 도자기의 내면에서 지속적으로 미세하게 진행되는 균열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준다. 그뿐 아니라 오랫동안 수분과 접촉한 찻잔에 베이는 잔 균열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앉혀지면서 생기는 도자기의 ‘청음’(淸音)은 그대로 소리의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진정한 도예는 실수마저 안아들인다 김문호는 2010년 독일 ‘보데 갤러리’ 전속 작가로 한국에서 전시회에 참여한다. ‘다완’ 등 생활자기 위주로 출품할 예정이다. 몇년 전 서울 인사동 가나화랑에서 ‘무안 분청전’을 했다. 그때 독일에서 온 ‘보데 갤러리’ 관장이 그의 작품을 보고 소장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보데 갤러리 관장의 선한 눈빛을 보고 “그럼 우리나라 돈 만원 가치만큼 독일 돈으로 준다면 건네겠다.”고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독일 전시가 추진되었고 전속 작가가 되었다. 김문호는 ‘파’(破)마저 자신의 생각대로 작품의 완성도에 참여시킨다. ‘破’란 일종의 실수이자 잘못이다. 그러나 그는 상처마저도 몸에 붙여 극히 자연스러운 형태로 바꾼다. 흙의 성질을 이용해 破를 버리지 않고 破마저 소중하게 끌어안아 작품을 완성한다. 이 세상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그의 도자기가 미학적인 이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