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서 태어난 '박성우의 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8-10-08 14:11 조회2,131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박성우 <달맞이 마을>, 캔버스에 유화, 116.8×97.0cm 침묵 속에서 태어난 ‘박성우의 산’ 화가 박성우의 작품 세계 화가 박성우의 화면은 침묵 속에서 태어났다. 세필을 들고 100호 화면 앞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는, 침묵 속에서 ‘박성우의 산’은 그 거대한 형태를 드러냈다. 박성우는 1984년 목포대 미술학과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는 80년대 대학 시절에는 민중미술 계열의 작업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목포문화운동연합 소속 미술패 ‘대반동’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밤을 세워 집회 현장의 걸개그림, 만장 등을 그렸다. 92년 분신정국에서는 노제(路祭)에 쓰일 영정 그림을 그렸는데,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다른 열사의 영정을 그려야했다. 그 시절은 누구에게나 가혹했다. 특히 순수예술 작가들에게는 창조성과 영감,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인생 전체를 요구했다. 그러나 박성우 뿐만이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묵묵히 받아들였기에 군부정권을 끝장낼 수 있었고, 유혈극 없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시대는 급변했다. 1991년 12월 25일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었다. 한국은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 서문은 숨막히도록 아름답게 시작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바라보아야 할 별이 꺼져 버린 시대, 기존의 프로파간다 형태의 선동적인 그림들의 효용 가치가 없어졌다. 삶의 가장 중요했던 시절이 그렇게 끝나버렸다. 민중미술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밀물처럼 들어와 있었다. 박성우는 그제서야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림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라는 작가로서의 근원적인 질문을 했다. 실경산수(實景山水)의 대가인 김천일 교수를 만나 ‘목포서화회’에서 글씨를 사사받으면서 조금씩 해법을 찾기 시작했다. 손을 푼다는 기분으로 먹의 느낌을 익히고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전서(篆書)에서 오는 글자가 만나는 결구(結句)의 구조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월출산이 가까이 있는 영암의 한 폐교에 작업실을 얻고 그림에 몰두했다. 세잔이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렸듯이, 그는 월출산을 그렸다. 그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상상력을 뿌리로 신화를 품고 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SUV차에 캔버스를 싣고 월출산에 올라 산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산은 매일매일 다른 형태를 띠고 다가왔다. 작년의 봄과 올해의 봄이 달랐다. 대상도 오래보아야 한다. 익숙한 것들을 깊게 바라보자 자연이 새롭게 보였다. 같은 봄인데 다른 봄이다. 올해 못 본 것이 내년에는 보일 것이다. 생각보다 대상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명료한 날이 많지 않았다. 그는 오래도록 끈기 있게 탐색했고 산의 신화를 발견하고자 했다. 산에는 모든 만물의 형상이 숨어 있었다. 당시 3m가 넘는 대형 작업을 했는데 한 작품이 완성되려면 1년이 걸릴 정도였다. 현대회화의 아버지인 세잔은 형태의 본질을 견고하게 탐구했다. 독일의 소설가 페터 한트케는 ‘세잔의 산을 찾아서’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실제로 앞에서 바라보면 생트 빅투아르 산은 세잔이 그린 산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다. 그림과는 달리 너무도 기이하고 독특한 형상 탓인지 세잔이 정말 이 산을 그린 것인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박성우의 현재 작업은 한국화와 서양화가 결합된 형태다. 재료는 캔버스에 오일로 그림을 그리는데, 붓은 한국화에서 사용하는 모필이다. 그는 세필로 머리카락 심듯이 그림을 그렸다. 먹붓으로 끈적거리는 유화물감을 사용해 전통산수의 필획법처럼 시도했다. 인내심이 없이는 그려내기 어려운 극세필 산수다. 그는 그동안 두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6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용흥리> <양자봉> <이등바위> <도갑사> <탑리> <월남리>를 발표했고, 2011년 도화헌 레지던스 작가전에서 <갓바위> <개신리> <온금동> <도솔암> <풀치>< 도갑사가는길> 을 발표했다. 그동안 그의 작품의 스타일이 변한 것은 없다. 가본 산을 다시 갔고, 걸었던 길을 다시 걸었다. 같은 대상이 새롭게 해석이 되었다. 재료나 기법에서는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한 화가의 조언으로, 한지인 당구지를 사용하고 색채에서는 ‘쪽’ 등 천연염료를 쓰기도 한다. 그림의 재료가 달라지니까 한국화에 더욱 가까와졌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대상의 디테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서 색채는 모노톤으로 변했고, 대상의 형태도 점점 단순해지고 있다. 새로운 사조라는 것도 현재에서 겨우 한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이다. 그는 그만이 해 왔던 작업에서 모티프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아가고 있다. 대상을 모노톤의 새로운 형태로 짜임새 있고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세계를 기다리고 있다. 여러 개의 바위들이 리드미컬한 결구(結句)를 타고,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핵심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는 전시회를 열거나 명예를 얻는 것보다 그리는 것 자체에 심혈을 기울인다. 계속하다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박성우의 화면은 화가의 정밀한 침묵과 깊은 고독을 견디고 태어났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조형 언어가 그 침묵을 뚫고 싹을 틔울 것이다. - 백은하 (소설가) 박성우 <도솔암>, 캔버스에 유화, 130.0×97.0cm 박성우 <온금동 Ⅱ>, 캔버스에 유화, 130.0×97.0cm 박성우 <서산동>, 캔버스에 아크릴릭, 90.9×60.6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