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화가 황재형 ④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8-12-12 18:00 조회1,556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화가 황재형의 작품 세계 - ④ 백은하 (소설가) <나의 천국에서 (In my heaven)>는 우울한 블랙톤이다. 과연 저곳에 어떤 삶의 희망이 있을까 의심하게 하는 지상의 끝, 달동네다.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은 살고 있고 자잘하고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는 것이다. 노동과 밥, 공부와 잠, 그리고 음악과 사랑. <In my heaven>은 <나의 천국에서>다. 밥 딜런의 ‘노킹 온 헤븐스 도어’라는 곡이 있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다.’이다. 그러나 황재형은 말한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고,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하루의 고된 노동의 피로를 풀기 위해 편안하게 몸을 녹일수 있는 공간, 황재형의 블랙은 서정적이다. <비탈길> <눈보라> <볕이 드는 두문동> 등에는 사계절이 뚜렷하다. 그리고 빛이 존재한다. 황재형의 화면에는 유난히 ‘오르막길’과 ‘오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계단을 오르고 있는 사람, 소실점이 위에 위치해서 올려다보아야 하는 언덕길. 올라야하는 길. 황지에 유난히 오르막길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비탈길>도 오르막길이다. <무거운 걸음>도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는 한 사내가 주인공이다. 한 사내의 굽은 등이 보인다. 추워 보인다. 블랙과 오렌지색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블랙이 강파르고 메마른 현실이라면, 오렌지색은 굽은 등의 사내가 품고 있는 이상적인 꿈이다. 사내는 끊임없이 강파른 현실을 견디면서 어딘가를 오르고 있다. 화면 속의 인물은 어깨를 웅크리고 걷고 있지만 마치 순례자나 선지자의 그것처럼 청교도적이다. 그 사내는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아들마저도 탄을 캐기 위해 갱도로 내려 보내야하는 가장일 수도 있고, 자신이 그린 작품을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일수도 있고,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청년일수도 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시인 신경림의 처절한 시구절이다. 우울한 날들이고 바람마저 분다. 그러나 그는 그 강파른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오르막길을 오른다. 그에게 과연 희망이 있을까? 그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눈보라>는 227× 162㎝의 대작이다. 화면 가득히 눈보라가 치고 있다. 금새라도 눈보라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황재형은 ‘눈’과 ‘바람’을 그리고 있다. <나의 천국에서 (In my heaven)>가 서정적인 블랙톤이라면 <눈보라>는 낭만적인 화이트톤이다. 블랙과 화이트는 아주 근원적이며 관능적인 색깔이다. 그러나 ‘색’(色)에서 ‘블랙’과 ‘화이트’를 제외한 나머지 색(色)은 섹스가 그런 것처럼 우리에게 쾌락을 준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르의 자연과 빛을 그리면서 옐로우와 바이올렛, 프러시안 블루를 거침없이 쓴 것처럼 관객은 그림을 보러갈 때면 본능적으로 ‘색채’를 원한다. 프랑스어에 ‘오렉시’(Orexie)라는 단어가 있다. 라깡의 ‘쥬이상스’(Jouissance) 보다 더 적극적이며 자극적인 단어다. 쥬이상스가 ‘열락’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면, ‘오렉시’는 ‘욕망’ 정도로 번역하면 어떨까.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욕망이 응집되어 있는 단어다. 라깡의 ‘쥬이상스’가 신(神)과 인간의 합일. 인간이 신적이 경지에 이를 때 느끼는 육체와 정신, 세포의 끝이 열리는 쾌락을 이야기한다면, ‘오렉시’는 훨씬 더 단순한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에 근거한다. 섹스의 그것과 닮았다. 반미학적(反美學的)이다. 리얼리즘 미술은 디오니소스적이라기보다 아폴론적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서사극 이론에서 “연극은 가짜다. 이것은 환상이다. 감정이입하지 말고 이성을 찾으라.”고 적극적으로 주문한다. 그래서 극(劇)의 중간에 극장 안의 조명이 모두 켜지고 연출가가 등장하기까지 한다. 관객은 화들짝 놀라고 옷을 벗고 있다가 광장에 놓여져버린 것처럼 민망하기 그지없다. 프로시니엄 무대에 익숙한 관객은 사고가 난 것으로 알고 심장이 덜컥할 것이다. 심지어 연출가가 등장해서 감정이입해있는 관객들의 흥을 모두 깨버린다. 가짜에 속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그 어떤 환상도 없이 오로지 ‘현실’만을 재현한다면 어떨까. 그런 예술이 미술사에서 지속될 수 있었을까? 황재형의 화면에서 ‘오렉시’(Orexie)를 찾는다. 즉 색(色)을 찾는다. 그것은 필자의 본능적인 욕망이다. 그림은 결국은 색(色)이다. 관람객은 화가가 ‘무엇을 그렸는가.’ ‘왜 그렸는가.’ ‘어떻게 그렸는가.’에 관해 깊이있게 사유하지 않는다. 그림이란 ‘눈’이라는 감각 기관을 통해서 색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도 ‘만들어진 색’ ‘창조되어진 색’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갤러리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자연이 선물한 색은 도처에 존재한다. 필자는 갈급한 욕망으로 황재형 화면의 색을 탐한다. 황재형 화면의 색은 느끼면 느낄수록 달콤한 낭만성이 느껴진다. <슬레이트와 화분>의 황재형의 블루는 미술사 속에서 체험한 프러시안 블루 계통의 다져지고 응축되고 학습되어진 색이다. 코발트라고 부르기도 하고 프러시안블루라 칭하기도 하고 그랑블루라 칭하기도 한다. 그랑블루와 코발트와 프러시안 블루와 블루 사이의 아슬아슬한 차이. 화가들이 얼마나 청색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빛에 의해, 시간대에 의해, 사물에 의해 그랑블루가 되기도 하고 프러시안블루가 되기도 한다. 황재형의 블루는 원색이어서 공격적이지 않다. 오랜 시간 모차르트의 ‘소나타 21번’을 들으면서 팔레트 위에서 시간을 견뎌낸 후 드디어 발화한 블루다. 시간과 사랑과 온기를 품고 있는 블루인 것이다. 황재형 화면의 색과 빛은 고요한 정조를 띠면서 음악성을 품었다. 음악이 아닌 음악성이다. 시인 황지우가 시(詩)가 아닌 시적(詩的)인 것에 천착했듯이 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