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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은하의 미술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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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하의 미술읽기

    꿈꾸는 씨앗 / 설치미술가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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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백은하 작성일06-12-13 08:57 조회3,5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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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소녀가 있었다. 사루비아꽃이 피어 있는 늦여름의 오후. 맨드라미는 붉다못해 핏빛이었다. 일곱살의 소녀는 작은 교회의 유리창을 통해 진보랏빛 휘장 앞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는 목사를 보았다.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 석양이 목사의 등을 감싸안을때까지 목사의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그 진보랏빛 휘장 뒤에 무엇이 있을지 타오르는 호기심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휘장 뒤에 정말 예수님이 있는 것일까.

      소녀는 스무살이 되었다. 성당에는 북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삭발을 하고 거리를 뛰어다녔다. 스무살이 이 된 소녀는 성당의 낡은 갈색 소파에 앉아서 브레히트의 시와 김지하의 ‘밥’을 읽고, 삭발한 신부님의 손에 이끌려 마당극을 연습하고, 선배를 따라서 수도원으로 간다. 명랑한 그 곳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법을 배우고, 미사창을 배우고 장미로 된 화관을 만들어 바친다. 수도원 정원에도 맨드라미가 피어 있었다. 그리고 수도원 3층에서 진보랏빛 휘장과 맞닥뜨린다. 그녀는 기어이 보랏빛 휘장을 들추고 그 속을 보고만다. 그녀는 세상에 부려놓고 추억한만한 첫사랑 하나 없이 명랑한 발걸음으로 수도원으로 향했고 수도자가 되었다. 생이란 그 어떤 장식없이 존재의 바닥으로 직진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많은 사람들은 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그 치열한 시간들을 뚫고 나와서 수도자가 되거나 예술가가 되거나 부모가 되었다.

      설치미술가 이기원은 어린시절, 어버지가 연필로 그림을 그리면서 동화를 이야기해주셨다고 한다. 그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고3때 ‘드가화실’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목탄으로 석고데셍을 했다. 그 날은 학교가 휴교를 했고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금남로에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그는 화실을 나서서 친구들과 함께 금남로로 향했다. 1980년 5월 17일 오전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오전에 그는 금남로 전일빌딩 앞 군중 속에 서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나와서 손에는 목탄이 묻어있었다. 거리의 열기에 휩싸여 서 있는 그 앞으로 트럭이 다가왔고 그는 트럭에서 내미는 손을 잡고 트럭에 올라탔다. 그리고 금남로에서 서방시장까지 트럭을 타고 갔다. 이 우연한 상황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시민군’이다. 그는 서방시장에서 트럭에서 내렸다. 그리고 ‘5․18’을 온 몸으로 체험한 세대가 되었다.

      긴 시간 재수를 하는 시간이 흘러갔고, 87년 전남대 예대 조소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대학 4학년에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광미공) 회원이 되었고 조소분과장으로 활동한다. 그는 광미공의 ‘오월전’으로 대표되는 정기 ․비정기전과 민중민족미술을 지향하는 안팎의 여러 기획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90년 두 번째 ‘오월전’에서 ‘임산부의 죽음’을 발표했다. 

    ‘광미공’ 사무실이 두암동에 있는 아파트 지하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비전향 장기수였던 서옹열 선생에게서 철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했고, ‘집체’ 라고 불리웠던 ‘집단창작’ ‘공동창작’에 참여했다. 그는 97년 광미공이 해체될때까지 광미공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 시절 그는 ‘5․18연작’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그 외 ‘해방공간’ ‘오월전사’ ‘대동세상’ 등의 부조연작과 ‘땅의 역사’ ‘한숨’(93) 등의 작품이 있다.

      이기원은 그 시절의 집단창작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과연 집단창작이라는 형식의 예술 방법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미술이 선전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숱하게 많은 예술가와 비평가와 지식인들이 질문하고 토론했다. 그리고 역사는 흘러갔고 우리 앞에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입이 열려있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율법을 어기고 총을 들어야만 했던 사제들처럼 80년대 민중미술 또한 미술이 단순한 기술이 아닌 미학적 존립기반을 갖는 예술이 되기 위한 한톨의 씨앗이었다고 긍정해야하는 시점이 왔다.

      이기원이 자신의 작품의 미학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즈음, 워커힐미술관에서 독일의 여성화가인 ‘케테 콜비츠’의 전시회를 보게 되었다. 케테콜비츠도 “나의 작품 행위에는 목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기원이 본 것은 작품의 목적성이 아니라 형식이었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보는데 정말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처음으로 빨리 작업실로 가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인 김수영은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라는 글에서 “시는 온 몸으로, 바로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라고 썼다.

      이기원은 작업실에서 흙을 만지면서 비로소 개인 이기원으로 돌아온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가족을 만난다. 그리고 그는 98년 서울 나화랑과 광주 궁동갤러리에서 ‘가족’이라는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가족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담은 ‘다시만나는 기쁨’ ‘등 뒤에서 잠든 아이’‘아버지의 바다’‘따뜻한 가슴’ 등을 발표한다.

      그 후 ‘얼굴이라는 경전’(1999), ‘모성-유희의 인간’(2000), 샤론의 꽃(2001), ‘모성-생명력’(2002) 을 연달아 발표한다. 몸에서 작품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2005년 롯데화랑 창작지원으로 이루어진 ‘디스토피아전’에서 그의 작업은 조각작업에서 설치미술로 확장된다. 정보와시대에서 개인의 존재에 대해 질문한다. 그는 ‘디스토피아전’에서 ‘DNA 생체실험’,‘유니포미티’,‘빅브라더’,‘샘영의 숨결’‘잠식’등을 발표했다.

      이기원의 관심은 항상 인간이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잃은 적은 없었다. 그가 산업폐기물을 이용해서 사회를 고발하는 작품을 하도라고 결국은 인간에 대한 애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결국 그가 기다리는 것은 유토피아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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