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 경계 / 아티스트 손봉채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백은하 작성일06-09-25 23:06 조회3,829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잃어버린 시간, 경계 설치미술가 손봉채의 작품세계 백은하(소설가) 낫을 든 크로노스. 시간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소멸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쓰지만, 그 비문마저도 세월의 풍화를 견뎌내지 못하고 바람결에 씻겨진다. 담양의 고즈넉한 숲에 아름드리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지금은 숲 속에서 잘 익은 볕을 받으며 녹음을 뿜어내고 있다. 그러나 그 소나무에는 일제강점기 말, 한 여인의 한이 담겨있다. 지금은 등산로가 된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그리고 군부의 폭력을 기억하고 있는 도청과 금남로. 슬픈 역사가 많은 우리나라 산하 곳곳에 전설이 담겨 있다. 설치미술가 손봉채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다닌 지 5년이 넘는다고 말한다. 2006광주비엔날레 ‘열풍변주곡’에 초대된 손봉채의 『경계』라는 작품은 그가 발품을 팔아 과거의 이야기 속을 따라다니면서 채집한 풍경들이다. 손봉채의 『경계』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 구절에서 출발한다. “모든 사물과 존재는 시간에 의해 파괴된다. 그러나 과거는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머물러 있다가 언제든 사물을 통해 되살아난다.” 그가 물었다. “사물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물. 필자는 그 순간에 솔방울을 생각했다. 담양의 소나무 이미지가 너무 선명해서 솔방울 속에 한 여자의 한이 숨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말했다. “사물은 현장이예요.” 그는 땅을 말했다. 가이아.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를 키운 신이 가이아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서는 생성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반대로 과거를 묻어두는 것도 현장이었다. 지금은 다사로운 햇살과 다정한 바람결이 느껴지지만 땅은 어둡고 음습한 과거를 품고 단단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손봉채는 그 땅과 소나무가 안고 있는 현재와 과거의 히스토리를 형상, 포름(form)에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현재와 과거가 포름이 될 수 있을까. 시간을 포름으로 만들 수 있을까. 형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일루전이 아닌, 시간의 경계를 보여준다고 한다. 필자는 디스플레이 중인 『경계』를 두 번 보았다. 항상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을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손봉채의 현장에는 커다란 유리부스들이 텅 비어 있었다. 작가도 없고 소나무도 없고 도청도 없고 알싸한 페인트 냄새만 났다. 두 번째 『경계』 앞에 섰을 때는 소나무가 설치되고 있었다. 소나무가 유리부스 속에 한 그루, 한그루 심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현재, 지금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는 관람객과의 인터렉티비티를 꿈꾸고 있었다. 유리부스 앞에 서 있는 관객이 유리부스 속에 서 있는 관람객을 보면, 부스 사이에 서 있는 관람객이 안개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점을 바꾸면 다시 반대편에 서 있는 관람객이 안개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장자의 호접몽과 닮아있다. 꿈속의 나비가 나인지, 깨어있는 현재의 내가 나인지. 손봉채의 시간은 서로 만나지 않는 이중의 나선구조가 아니라 선으로 맞닿아 있다. 그의 시간이 시작과 끝이 있는 선분인지, 영원히 알 수 없는 무한대인지는 작가에게 또 다시 질문해야 할 일이다. 설치미술가 손봉채는 조선대 조소과와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했다. 그의 공식적인 한국 첫 데뷔는 97년 제1회 신세계미술제 대상 작가로 선정되면서다. 그러나 설치미술가 손봉채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전시회는 97광주비엔날레 ‘지구의 여백’ 본전시 (Main Exhibition) 『권력 ․ 金 』 전이었다. 성완경 교수가 큐레이팅한 『권력 ․ 金 』전은 전통적인 권력의 개념과 현대사회의 다양한 구조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권력의 양상을 보여준 전시였다. 정보혁명으로 전세계적으로 확장된 정보의 소통망을 통해 현대인은 스스로를 길들이고 통제하는 엄청한 기능적 시스템, 권력을 구축했다. 현대의 권력은 우리의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는 방사형의 그물망이다. 손봉채는 천장에 매달린 수천개의 자전거 바퀴로 ‘빅브라더’를 소리로 느끼게 해 주었다. “설치를 모두 끝내고 버튼을 눌렀을 때, 자전거 바퀴들이 맞물리면서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제 심장도 쿵쿵거렸습니다.” 그의 심장만 쿵쿵거린 것이 아니라, 관람객들도 공포스러운 음향 속에서 소름끼치게 일상적인 권력의 폭력성을 느꼈다. 그가 발표했던 ‘보이지 않는 구역’은 개념적이거나 정신적인 작품이 아니라 관람객에게 피지컬한 긴장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지구의 여백’에는 존케이지의 ‘쏘로우에 의한 드로잉의 프로젝션 앞’ 도 함께 초대되었는데, 존케이지의 ‘쏘로우에 의한 드로잉의 프로젝션 앞’ 도 검은 공간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관람객에게 육체적인 공포감을 느끼게했다. “저는 97광주비엔날레 전시장, 대가들의 작품의 숲에서 숨도 쉴 수 없을만큼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받아들였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미술에 대한 모든 지식들보다 그 한번의 전시회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저는 ‘게리 힐’의 작품들에 매료되었고, 현재까지 오는데 가끔씩 ‘게리 힐’의 작품들을 반추했습니다.” 그 때 그는 겨우 서른살이었다. 서른살의 청년 아티스트의 작품이 존케이지, 요셉보이스, 백남준, 빌비올라, 게릴 힐 등 현대미술사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대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빛을 발했을 때, 작가에게 쏟아진 것은 스포트라이트 그 자체였다. 어느 문학평론가는 한명의 청년 작가는 빛 속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난생설화처럼 모든 사람들이 한 청년작가의 탄생을 동시에 직감하는 것이다. 그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와 무관하게 그저 에너지, 빛 자체를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손봉채는 아프게 그 빛의 대가를 치르면서 시간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 산업 사회에서 고통의 시간들로 담금질되지 않은 파인 아트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어느 선생님은 자신이 소설을 쓸 때, 숟가락으로 사과 속을 파먹는 것처럼, 자신을 파먹어가고 있다고, 자신이 점점 비어가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그가 견디어낸 생의 대가가 어떻게 그의 작품에 녹아났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작가는 그저 견디어내면서 산하를 거닐었을 뿐이다. 『경계』 속에는 도청이 있고 소나무가 있다. 그가 만났던 것은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전시장은 현재이다. 작가는 과거를 살았고 관람객은 현재를 산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