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하지만 정겨운 남도 정취 - 석현 박은용의 회화세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인호 작성일21-11-24 14:23 조회2,401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박은용 <추수2>, 2000, 한지에 수묵담채, 128x213cm, 개인소장 투박하지만 정겨운 남도 정취- 석현 박은용의 회화세계 2021. 11.19-2022.2.13 / 동곡미술관 보문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동곡미술관이 개관 1주년 기념으로 ‘석현 박은용 : 전원에 산다’ 전시를 열고 있다. 석현의 타계 10주기가 되던 2018년에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큰 규모로 회고전이 열린지 3년여 만에 ‘석현 박은용 기념사업회’의 협조를 얻어 다시 그의 회화세계를 되돌아보는 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원래 석현은 조선대학교 부속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청소년기에 전국학생실기대회에서 최고상 등 우수한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예술감각과 묘사력을 인정받았다. 이를테면 서양화법의 하나인 수채화로 그림을 익힌 셈인데, 그러다가 필묵으로 전환하여 서라벌예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하였다. 서양화법으로 다져진 그림의 바탕은 초기작에서 다른 한국화가들과 달리 화폭에 등장하는 소재 선택, 인물이나 기물, 경물들 묘사에서 비례감이나 투시화법식 원근감 등에서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다가 점차 한국화 전통의 운필과 묵법, 준법들을 익히고 자기화해내는데, 80년대 작품들은 세필묘사로 너른 들녘을 화면 가득 채우면서 그 안에 시골 농군의 일상을 곁들이는 구성을 즐겼다. 그러다가 화순 남면 두강마을로 이주한 90년대 들면서 점차 갈필 적묵 위주의 현장감 나는 화면들을 그려내었다. 기존 전통 필묵법이나 재현적 묘사를 벗어나 파격의 거칠고 굵은 필선 위주로 실재와 상상을 결합한 생활단상이나 풍속화들은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어린 시절 한국전쟁기 때 집단학살 가족참변의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분열증과 경제적 궁핍에 따른 심적 고뇌까지 겹치면서 훨씬 무겁게 덧쌓인 필선과 먹색들로 독특한 화풍을 이루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동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40여점의 석현 작품 가운데서 20여점을 골라내고, 기념사업회 회원과 개인소장자들로부터 일부 작품을 대여 받아 다수의 미공개작을 포함한 30여점으로 전 생애의 작품들을 펼쳐놓았다. 이 가운데 <해동>(1975)은 크고 작은 바윗돌들뿐인 마른 계곡인지 돌벽인지를 화면 가득 채우고 거기에 겨울추위 때 얼었던 계류가 녹아 가느다란 물줄기로 흘러내리는 구성이다. 소재선택도, 화폭의 구성도, 돌들의 음영처리에서도 서양화법이 나타나는 청년기 작품의 한 예다. 그에 비해 같은 70년대이면서도 한국화 전형을 따른 6폭 병풍그림 <고향풍경>(1978)은 석현 화풍의 변화과정을 보여준다. 초봄부터 한겨울까지 계절별 시골풍경을 묘사한 산수화인데, 수채화에서 익혔던 맑은 먹빛에 전통 준법을 따르면서 투명하게 중첩되는 운필들, 먹의 농담과 필선의 강약, 근경부터 원경까지 종축 구도 사이 강변운무를 둔 여백처리 등등에서 한국화의 기본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크로키선을 연상케 하는 인물묘사, 투시화법 부감에 의한 나룻배나 경물배치의 원근감 등은 서양화의 기본화법이 남아있는 흔적이다. 80년대 작품에서는 1983년에 그린 <정담>과 <들꽃>을 예로 들어볼 수 있다. <정담>은 추수가 끝난 텅빈 들판 논두렁에 지게를 내려놓고 않아 담배 한 개비에 현실의 무게를 넋두리하고 있는 두 농부의 모습이다. 근경에서 원경으로 멀어져가는 단처럼 구불거리는 논두렁들이 화면을 가르고 논바닥은 농부들의 심중만큼이나 온통 거칠고 성근 갈필들로 채워져 있다. 녹록치 않은 현실 그대로를 화폭에 담아낸 스산한 분위기의 풍경이다. 그런가하면 <들꽃>은 그 가을걷이가 끝난 마른 들녘 논두렁길을 등에는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광주리를 얹은 채 발걸음을 서둘러 지나가는 아낙이 주인공이다. 화면 앞부분의 바람에 흔들거리는 구절초무리와 억새, 아낙 주변의 깡말라 서걱거리는 옥수수대들, 논두렁에 놓인 마른 풀더미와 노적 등등이 시골정취를 깊이 있게 우려내면서 포착해 내었고, 갈 길을 밝혀주듯 아낙 앞을 휘돌 듯 돌려진 엷은 먹빛의 들길이 <정담>과는 달리 희망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마른세필로 화면을 거의 채우는 석현의 80년대 화면들은 화순 두강마을로 들어간 90년대 들면서 화면은 여전히 가득 채워지는 구도이면서도 점차 굵은 필선에 먹색이 진해지고 농묵들과 경물윤곽부분 여백들이 화폭에 조이고 풀어주는 강약조절을 보여준다. <한가한 날>(1992)은 마른 나무들과 성근 단풍잎으로 계절을 나타내면서도 그보다는 물기 머금은 붓질의 무성한 붓질들을 둘러 세우고, 그 사이 작은 밭뙈기 사이 가느다란 계곡건너 마을로 무리지어 돌아가는 시골아낙들의 모습이다. 갈필과 선염, 농묵과 채색, 굵고 힘주어진 윤곽선들은 점차 뒤로 갈수록 선명해지는데 <초여름날>(1997)은 그런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필법과 진한 채색의 말년 경향들로 이행되어가는 시기의 예이다. 무시로 영혼을 옭아매는 심각한 정신질환과 고뇌에 시달리면서도 그림으로 삶의 출구를 찾고 정신적 해방구를 얻고자 한 석현은 그림은 90년대 후반 이후 2000년대로 이어지면서 점점 더 거칠고 강직한 선들과 무거운 먹빛, 진한 채색들로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내었다. <비오는 날>(1998), <기다리는 사람들>(1998), <귀가>(1999), <해질녘>(1999), <추수>(1997, 2000), <가을걷이>(2000) 등은 투박하고도 정겨운 시골정취를 담아내면서도 그런 작업 뒤에 깔린 작가의 상황과 정신세계를 별개로 여길 수가 없다. 이 가운데 석현이 이시기 즐겼던 종축화폭 구도의 <비오는 날>은 마당에 빗물이 물결을 이룰 정도로 후줄근히 젖은 빗속 촌가에서 희미한 전등불 아래 벗들과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며 즐겁게 얘기들 나누는 풍경이다. 여기에 아이를 안고 안주를 내어오는 아내와, 마루에 엎드려 책 있는 딸아이, 광주리 가득한 소채와 뜨락의 꽃들의 화사한 채색, 어미황소와 새끼까지 화면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같은 시기에 그려진 <기다리는 사람들>은 봄날 맑게 비개인 뒤의 시골풍경인 듯 물기 촉촉한 들판과 안개 걷히는 산등성이들, 또렷한 윤곽선들의 인물들이, 특히 정류장 앞에 옹기종기 모여 버스를 기다리는 마을사람들이 정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추수2>(2000)는 추수한 볏단들을 묶어 소달구지에 올려 싣는 모습들을 굽이도는 작은 개울과 맑은 빛의 나무들, 멀리 펼쳐진 구릉지대 전답들로 감싸 안 듯 묘사하여 어느 화폭보다 평온함을 주는 그림이다. 이번 석현 박은용 회고전은 뛰어난 기량과 예술적 감성을 지닌 작가의 본 바탕과, 예기치 않게 목도해야 했던 충격적 가족사, 이후 의욕적인 작가의지에도 불구하고 내내 그를 괴롭혔던 정신질환과 심적 고뇌 속 몸부림과도 같은 화폭위의 필묵들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그가 화폭에 담아낸 투박하고 정겨운 남도의 미감과, 상처 깊은 맑은 예술영혼의 자위와 고통이 교차했을 힘겨운 생의 자취들이 안타까움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전시다. -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박은용 <해동>, 1975, 한지에 수묵담채, 163x120cm 박은용 <정담>, 1983, 수묵담채, 45X62cm, 개인소장 박은용 <들꽃>, 1987, 한지에 수묵담채, 41X63cm, 개인소장 박은용 <고향풍경>, 1978, 6폭 병풍과 부분, 한지에 수묵담채, 각 101x31cm, 동곡미술관 소장 박은용 <비오는 날>, 1998, 한지에 수묵담채, 92X62cm,_개인소장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