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연고작가 재조명, 김정현 고화흠 회고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인호 작성일23-02-12 15:12 조회1,513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김정현 <설로 雪路>, 1973, 종이에 수묵담채, 86.3x47.3cm/고화흠 <백안 白岸 90>, 1990, 캔버스에 유채, 162x133cm 전남 연고작가 재조명, 김정현 고화흠 회고전 영암군하정웅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기획 오래전 타계한 지역 연고작가를 재조명하는 전시가 나란히 열리고 있다. 전남 지역에서 태어났거나 이를 기반으로 활동한 수많은 작고작가들 가운데, 특히 출향작가는 몇몇 전시에 작품이 소개된 것 말고는 작품세계나 활동이 별로 알려진 바가 없어 지역미술계에서조차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작고작가의 재조명은 일반 사립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공립미술관의 공적인 접근과 재원, 조직력을 활용할 경우 보다 더 체계적인 조사와 기획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영암군하정웅미술관의 ‘숨겨진 거장 소송 김정현 회고전’(2022.12.20~2023.3.13)과 전남도립미술관의 ‘이제야 비로소 나의 백안을 찾아-고화흠 회고전’(2023.1.17.~3.26)은 두 분 다 그동안 이 지역에 작품이 소개된 적이 별로 없는 지역 연고작가 회고전이다. 김정현전은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 위주로, 고화흠전은 도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대부분이면서 유족소장품이 일부 더해진 구성이다. 전통 한국화 탈피와 서양화 요소의 결합- 김정현 회화 타계한지 46년 만에 유작들로 고향을 찾은 소송 김정현(小松 金正炫, 1915~1976)은 영암 출신으로 하정웅미술관이 있는 구림마을의 구림초등학교 졸업생이다. 이후 목포로 이주해 있는 동안 독학으로 서양화를 그리다가 동경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 일본화과에 유학하여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하였고, 일제강점기 말인 1942년부터 44년까지 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연속 입선하기도 하였다. 광주 연진회에 가입하여 의재 허백련 문하에서 필묵을 익히기도 했고, 해방 후 목포여중·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전통 수묵남화가 주류인 호남화단을 떠나 서울로 옮겨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입선과 초대작가,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한때 서양화를 그렸던 그는 호남의 남화 전통보다는 사실화풍 채색화계열에 흥미를 둔 데다, 기성화단의 타성에서 벗어나 신감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확산되던 1957년 김기창 박래현 천경자 이유태 등과 백양회를 결성하여 1978년 해체될 때까지 꾸준히 활동을 함께하였다. 이번 회고전에는 그다지 많은 작품이나 자료가 전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목포에서 활동하던 1940년대 후반 주변 풍경들의 스케치부터 50년대 전통화법을 벗어난 독특한 화제와 화폭의 현실주의 작업들, 1960~70년대 전통 수묵산수와 서양화형식을 결합한 산수풍경, 화조화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1949년 당시 진도 운림산방의 모습을 그린 <운림동 소견>이나 1940년대의 목포 만호동 북교동 등의 풍경 스케치를 비롯, 한국전쟁 직후의 불안감과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을 함께 느끼게 하는 전투기의 공중회전 비행 모습 <굉음을 바라보다>(1954),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회오리모양을 그리며 화면 가득 날고 있는 <까마귀떼>는 독특한 소재와 구도의 수묵담채화다. 아울러 1951년작 <신일청풍 晨日淸嵐>과 1963년 <봄빛>, 1973년 <설로 雪路> 등은 전통산수화와 서양 풍경화 요소를 융화시킨 화폭들이고, <풍경>(1960), <신록>(1961), <숲>(1968), <봄날>(1968) 등은 나무를 주 소재로 화폭을 채우면서 그 사이에 작품마다 부엉이, 오리, 사슴 등을 곁들인 독자적 화면구성을 볼 수 있다. 또한 까실거리는 보리밭 위를 노닐고 있는 제비가족 <보리>(연대 미상). 서양 정물화처럼 채반 가득 가을걷이 과일들을 풍성히 담아그린 <전가풍미 田家豐味>(1975)도 일반적인 한국화들은 아니다. 이번 전시에는 백양회 활동사진 등이 모아진 사진첩과 신문 잡지 자료들을 모은 스크랩북 등이 함께 전시되고는 있지만 활동범위에 비해 작품수도, 관련 자료도 많지 않아 좀더 폭넓고 깊이 있는 재발견에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출생지 연고 외에 관련 전시나 활동에서 고향과 그다지 연결고리가 많지 않았던 그의 40여년 작품들을 고루 만나보는 기회가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상향을 담은 비정형추상 화폭 – 고화흠의 회화 한편 광양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화흠 회고전은 당대 미술과 작가의 작품세계를 연결지어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다. 그 또한 지역미술 연고작가로 꾸준히 포함되고는 있지만 출생지 외에는 미술 관련 활동에서 이 지역과 별다른 연결점은 없었다. 따라서 이번 회고전에서 이를 바로잡는 작품활동이나 자료가 포함되지 않았을까 기대하였으나 그러기에는 전시작품 수도, 관련 자료들도 그리 많지는 않고, 미술관 관계자도 특별히 연결된 활동은 없는 거 같다고 하였다. 도록제작이 진행 중이라 하니 혹 거기에 좀더 자세한 연보가 포함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고화흠(高和欽, 1923~1999)은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전주 사범학교를 거쳐 동경 녹음사화학교(綠陰社畵學校) 회화과(1945년 졸업)에서 그림을 익혔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주관한 [선전 鮮展]에 입선(1937, 1938)하기도 했고, 해방 후에는 시대변화에 따른 신미술 기운이 활발하던 1957년 장리석 유경채 이준 등과 ‘창작미술협회’를 결성하였다. [국전 國展]에 추천작가 초대작가로 참여하고, 1976년부터는 원광대 미대에 재직하게 되는데 이처럼 활동지가 서울과 전북지역이어서 화단 활동에서 고향 전남화단과는 별다른 연결이 없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미술 입문기나 청년기의 작품들은 소개되지 않고, 1960년대부터 작고하는 90년대까지 작품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구상회화로부터 1960년대에 점차 형상을 털어내는 반추상 단계를 거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후 70년대부터는 비정형 추상화면인 ‘백안 白岸’ 연작으로 옮겨가는 흐름을 보여준다. 60년대 작품 중 굵은 붓질 속에 과반을 머리에 인 모녀의 형상이 뚜렷한 <무제>(1964)에서 입체파식 분할묘법으로 한 쌍의 목장승 형상을 더 많이 털어버린 <무제>(1967), 그보다 더 구상적 요소를 줄여 풍경과 인물 두상들을 암시형태로만 남긴 <무제>(1967) 등이 그런 예들이다. 형태를 생략하거나 간결하게 처리해도 늘 굵은 붓터치가 바탕을 이루는데, 1970년대 들어서는 형상이 사라지고 굵고 거친 붓질들만이 물결처럼 일렁이거나 화면에 집중과 해체로 강약을 조율한 ‘백안’ 연작들로 진행된다. 화면구성으로 보면 1950년대 말부터 후배 전후세대들에 의해 전위미술운동의 방편으로 차용된 ‘앵포르멜’ 형식을 그도 취하고 있는 것인데, 다만 그들과 달리 뿌리고 흘리고 뭉개기보다는 여전히 붓질의 필촉효과를 위주로 한다는 점이 다르다. <욕망>(1970>, <백안>(1985), <백안>(1990) 등 일련의 작품들이 그렇고, 다만 어떤 제작 배경이 있는 것인지 1998년작 <풍운기 風雲記>는 60년대처럼 한복을 입은 인물들과 파도치는 바닷가 풍경을 읽을 수 있는 구상요소들이 격자로 분할된 화면 위에 선명히 드러나기도 한다. -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김정현 <굉음을 보다 視轟>, 1954, 종이에 수묵담채, 66.5×88.5cm 김정현 <까마귀떼>, 연도미상, 종이에 수묵담채, 136.0×164.0cm 김정현 <보리>, 연도미상, 종이에 채색, 41x59cm 소송 김정현 회고전 전시관 일부 고화흠 <무제>, 1967, 캔버스에 유채, 107x107cm 고화흠 <욕망>, 1970, 캔버스에 유채, 110.5x110.5cm 고화흠 <백안 白岸>, 1990년대. 캔버스에 모래, 유채, 96x144.5cm 고화흠 회고전에서 1990년대 '백안' 연작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