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깊이 새겨놓은 일상' ; 정승원의 작품세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21-06-24 12:26 조회1,990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정승원 <양동시장>, 2017, 실크스크린,_140x70cm 마음 깊이 새겨놓은 일상 ; 정승원의 작품세계 2021.06.15.-08.15 / 함평군립미술관 ‘동아시아 판화전-새김과 되새김’ 2021.08.03.-08.17 / 서울 갤러리 신공간 묵혀둔 외장하드를 정리하다보면 우연히 오래된 사진들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처음 보는 것처럼 생소한 찰나의 순간이지만, 추억을 상기하는 그 시간만큼은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소중한 기억들과의 조우는 그렇게 다시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낸다. 어디에선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올 때의 반가움처럼 ‘새삼스러운 기쁨’,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함. 정승원의 작품 또한 이와 유사한 감정을 전달한다. 선물 같은 그림 판화작업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정승원은 학부시절에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광고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공부는 졸업 후 편집디자인 일로 이어졌지만, 깊이와 경험에 대한 갈증은 그를 돌연 유학길로 이끈다. 정승원은 독일 브레멘 국립예술대학에서 통합디자인을 공부하며 10년 남짓한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 속에서 디자인 분야만이 아닌 연관된 장르들을 접하며 다양한 표현기법을 습득하는데, 현재 작가의 주된 작업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실크스크린 또한 이 시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의 본격적인 판화작업은 의도치 않은 지점에서 비롯됐다. 정승원은 유학시절을 함께한 친구들과의 헤어짐을 앞두고 함께 스톡홀름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이후 소중한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그림으로 선물하고자 소품의 판화를 제작하게 되는데, 이 자그마한 선물이 판화작업의 시작이었다. 흑백 색상의 1도 프린트 형식으로 제작한 작품 <스톡홀름>이 정승원 판화의 처녀작으로, 화폭 안에는 여행 중의 자잘한 사건 사고 혹은 추억들이 빼곡히 자리한다. 한 장 한 장의 에피소드 카툰이 집합된 형태로 구성된 화면은 보는 이에게 읽는 재미를 선사하며, 예상 밖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그는 유학생활의 기억을 실크스크린 작업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2017년 베를린에서 그간의 작품들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길거리에서>라는 주제로 치러진 첫 개인전에는 그의 지나간 시간들이 깨알같이 등장한다. 어느 여름날 강가의 물놀이 풍경, 해년마다 겨울이면 문전성시를 이루던 크리스마스 마켓, 오래된 역사에 위치한 시끌벅적한 레스토랑, 계절마다 함께한 아내와의 캠핑, 그리고 뒤늦은 신혼여행의 추억까지, 아무개의 일상과 유사한 장면 하나 하나에는 작가만의 따뜻한 시선이 배어있다. 각각의 장소에 깃든 사람들의 일상은 그저 평범한 ‘사람살이’일 뿐이지만, 너와 나의 일상이 화폭으로 구현되는 순간 이내 그 삶은 유의미한 순간으로 치환된다. “마치 선물처럼, 받으면 기분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유학시절에 좋아했던 장소나 기억들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결국에는 작품을 보는 이들의 소중한 추억까지도 함께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인해 마냥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며, 새삼 그림으로써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생의 어느 행복한 순간을 스쳐왔던 이들에게 그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 그림만큼 귀한 선물도 없을 테다. 예술에서 너무나도 흔히 쓰이는 표현이 소통과 치유라는 단어라지만, 어찌 보면 정승원에게 있어 소통과 치유의 개념은 작업의 진심이자 전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날로그적인 감수성 정승원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충실한 서사와 해학이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기억을 수집하는 과정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그는 관람객 또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를 수 있기를 바란다. 몇 년 간의 근작에서 이뤄진 재료적 실험은 이러한 고민의 일환으로, 기존 안료에 더해 야광물감과 발포물감 등을 이용해 빛과 질감 면에서 시각적인 풍성함을 의도한다. 화면 속 인물들의 크기나 배치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대동소이하지만, 이야기에 재미를 줄 수 있는 장치를 삽입함으로써 전체적인 분위기에 위트를 더한다. 의자 다리에 묶여 있는 부산스러운 강아지와 강아지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호기심 가득한 아이, 빵집 앞에서 당당히 빵을 쫓아먹던 새들은 의인화되어 의기양양하게 자리하기도 하고, 동물원이 내다보이는 상점 안의 사람들은 동물원의 원숭이들과 대비를 이루며 생동하는 에너지를 전달한다. 과감한 색채 구사와 함께 일러스트적인 요소가 강한 그림체이지만 정승원의 화폭은 회화적인 미감을 충분히 전달한다. 브레멘의 축제 <프라이막>과 무등산을 배경으로 한 광주의 <양동시장>이 똑같이 정겹고 흥겨운 이유는 작가가 온전히 그 장소와 사람에 집중한 탓이다. 더불어,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공판화 기법이라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과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장르에 대한 편견을 상쇄시킨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재밌어서 시작한 작업이라지만, 달리 보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작가만의 성향이 외려 작품의 큰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모빌 설치 및 미디어 영상작품과 같은 근래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형식적 실험부터 목판화의 투박한 칼 맛에서 길어 올린 전통의 감성까지, 그의 일상적 경험과 기억의 형태는 현재 변화무쌍하다. 6년 전 귀국한 작가는 그동안 많은 기획전에 참여하고 부지런히 개인전도 열었다. 8월에 서울에서 있을 작품전이 어느새 다섯 번째 개인전이다. 유학 시기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길지 않은 화업(畵業)이지만, 그것이 작가로서의 인위적인 다짐과 의도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었기에 여전히 그 호흡이 자연스러워 뵌다. 하회탈의 춤사위에서 착안한 모빌에는 탈을 쓴 군상이 자유롭게 춤을 추고, 크리스마스 마켓과 겨울캠핑은 영상작품으로 재구성되기도 했다. 많을 때는 50여 개의 제판으로 찍어낸 장면 하나하나에는 정승원만의 휴머니티가 응축되어 있다. 본인 작품의 결을 물었을 때 그는 한마디로 ‘일상’이라고 답한다. “주변에 널려있지만 못 보고 지나쳐버리는 일상, 그 소중한 일상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예전과는 달라진 일상에 더욱 가픈 숨을 몰아쉬는 요즘이지만, 하루하루의 삶 안에서 여유를 찾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녹록지가 않다. 새로울 것 없는 정승원의 화폭이 자못 친근하고 기분 좋은 이유는 단순히 화면상의 밝고 유쾌한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 게다. 삶을 바라보는 그의 따스한 시선처럼, 여느 때보다 긍정적인 기운이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 싶다. - 고영재 (독립큐레이터) / 전라도닷컴 2021년 7월호 ‘고영재의 작가탐험’ 연재 정승원 <스톡홀름>, 2016, 실크스크린,_50x50cm 정승원 <Krumme Lanke>, 2016, 실크스크린, 70x50cm 정승원 <프라이막>, 2018, 실크스크린,_186x100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