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현 박은용과 잃어버린 꿈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일영 작성일19-01-30 11:15 조회3,218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작업 중인 석현 박은용 (석주 박종석 화실에서, 광주시립미술관 회고전 자료영상 중) 석현 박은용과 잃어버린 꿈 석현 박은용의 회고전이 지난 12월 6일부터 오는 2월 10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열정과 가난과 정신적 고통과 자살로 이어진 파란만장한 고인의 예술과 인생을 되비춰보는 소중한 전시회이다. 그런 가운데 석현 박은용의 전시작품에 대한 깊은 공감이 계기가 되어 작가와 작품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니며 그의 안타까운 삶과 작품들을 직접 접했던 분의 글이 발표되어 박은용 화백을 더욱 마음 아프게 추모하게 한다. [브레이크뉴스]에 1월 28일 올려진 이일영 한국미술센터 관장의 귀한 회고의 글을 간추려서 공유한다.(편집자) 필자가 오랜 화혼을 품은 남도의 섬 진도 출신 박은용 화가를 처음 접한 것은 1983년이었다, ‘박은용 작품 20년 전’이 열리고 있던 서울 동덕미술관에서 당시 ‘어머니의 땅’으로 대표되는 박은용 화가 작품을 처음 만났다. 전시 작품은 작가의 청옥동시기 대표적인 작품들로 대작들이 많았다. 당시 박은용 작가의 ‘어머니의 땅’ 시리즈 작품은 여러 동양화의 기법과는 너무나 다른 표현기법으로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근대 한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청전 이상범의 갈필산수(渴筆山水)와 소정 변관식의 중묵(中墨)을 층층으로 쌓아 올려 먹빛의 깊은 울림을 토해 놓은 적묵(積墨)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박은용은 우리의 산하에 담긴 정신성을 품은 사경의 맥락을 더욱 사실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박은용이 모든 것을 낳는 땅(地)이 가지는 의미를 어머니(母)라는 의식으로 끌어간 것이다. 박은용 <새벽에 씨뿌리는 여인>(부분, 1982), <적벽을 닮은 풍경>(부분, 1983), 수묵담채 ‘어머니의 땅’ 시리즈 작품은 두 가지의 특성이 있었다, 하나는 대작의 하단에서 무수한 점들이 엉켜 들어 망울진 점을 이루고 있는 이른바 ‘점망’(點罔) 형태의 작품들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작품 ‘일하는 여인’(1982)과 ‘청옥동 풍경’(1982)에서 살펴지는 극히 절제된 푸른빛 녹색의 표현이다. ‘어머니의 땅’ 전시 작품을 보면서 역사의 숨결과 민중의 눈물을 무수한 점으로 찍어간 의미와 처절하게 녹아내린 푸른빛 녹색의 빛깔에서 작가가 추구한 신성한 생명과 희망의 빛깔이 아픈 역사의 함성과 자꾸 겹쳐오는 느낌을 떨치지 못하였다. 필자는 ‘어머니의 땅’ 전시 이후 몇 년이 지난 후 전시 작품을 수소문하였으나 그 누구도 단 한 점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작가를 찾아 나선 이후 화랑가에서 많은 이야기가 난무하였다. 동덕미술관 전시 이후 건강이 악화하였다는 이야기에 이어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한편에선 민중의식을 가진 작가를 누군가 밀고하여 기관에 조사를 받고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어 병원에 투병 중이라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이에 부인과 이혼하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와 같은 과정에서 동덕미술관 전시 작품을 모두 잃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후 1990년 7월 작가의 소재지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고 휴가를 내어 찾아간 곳은 화순군 남면 사평리를 지나 사수리에 있는 두강마을 이었다. 거대한 고목이 서 있는 마을 입구를 지나 물어물어 찾아간 집 대문은 굳게 잠겨있었으며 대문에는 고추가 없는 숯덩이만 매인 금줄(禁绳)이 걸려있어 딸아이의 탄생을 알리고 있었다. 굳게 잠긴 대문 앞에서 서성거릴 즈음 옆집 할머니가 사정이 심각함을 설명하면서 할머니 집 담을 넘어 들어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들어간 작가의 집안은 참으로 참담하였다. 겨우 얼굴을 내민 산모는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부어있었고 작가는 한여름 무더위에 무명베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전신을 떨고 있었다.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난 작가는 마당으로 나와 갑자기 작대기 하나를 집어 들더니 마당에 금을 그었다. 더는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른 나뭇가지와 풀들을 쌓아놓고는 불을 피우고 부채를 가져와 우리 일행에게 연기를 퍼부어댔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1990년에서 199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광주 시내 곳곳의 표구점과 화랑에 가장 많은 작품이 나돌고 있었다. 당시 작품들은 예전의 산수풍경의 작품이 아닌 선이 굵은 채색화였다. 이 무렵의 작품은 작가의 특성적인 감성과 정신성이 비어버린 그림이었다. 이는 현실의 문제로 인한 다작으로 극히 불안정한 정신 상태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않았던 가장 치열한 삶의 기간이었다. 박은용 <기다림>(1999),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1998), <가을날>(2001), .수묵담채 그의 회화적 구분은 1987년까지의 수묵 시대와 이후 채색 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이는 작가의 첫 부인과 이혼 이후 1984년 무렵 우여곡절 끝에 박은용 작가의 치열한 삶의 동반자가 되어버린 임정숙 작가와의 인연에서부터 새로운 작업이 이루어진 배경이다. 1994년 무렵 두강마을에 작가 스스로 흙벽돌을 찍어 화실을 지었던 시기에 한 여름 일터에서 돌아온 아내가 딸과 함께 목욕하는 장면을 그려낸 ‘모녀’(母女) 작품은 작가 박은용을 존재하게 하는 현실과 예술의 정신적인 바탕이었다. 박은용 <모녀>(1998, 수묵담채) 초기 모녀의 작품은 짙은 먹빛의 배경 속에서 모녀의 모습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후 차츰 밝아진 배경의 색감이 살아나면서 따뜻하고 평온한 화면을 이루었다. 이어 화사함까지 느껴지는 한층 밝은 색조의 배경과 함께 과일과 꽃이 등장하면서 여인의 방향이 다양하게 그려졌다. 이러한 ‘모녀’(母女) 작품을 바탕으로 변모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시골의 일상을 소재로 하는 향토적이며 서정적인 감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이야기는 귀로와 기다림이었지만 시골 장터의 풍경에서부터 시골 생활의 다양한 일상을 향토적인 감성으로 매만져갔다. 필자는 2008년 9월 작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몇 년 후 딸이 결혼 일자를 받아놓고 세상을 떠났다는 실로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천만 근 쇳덩이 같은 무게로 짓누르는 가난이라는 현실의 멍에 속에서 일생을 정상과 실성의 경계를 오가는 작가의 배우자가 되어 꽃다운 청춘과 모든 삶을 바쳐 예술가의 아내로 친구로 그리고 동지로 동행한 여인(임정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박은용의 예술세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었는지 깊게 생각해 볼 내용이다. 천재 화가 석현 박은용! 그가 남긴 뜨거운 예술혼이 녹아내린 작품 앞에서 우리는 시대를 관통한 예술가의 처절한 삶의 흔적을 매만지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와 함께 단 한 번도 펴지 못한 스케치북의 그림처럼 잃어버린 꿈을 안고 홀로 남은 비련의 여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일도 우리의 몫일 것이다. 바람은 울지 않는다. 오직 바람에 스친 세상이 우는 것이다. - 이일영 (시인, 한국미술센터 관장) 광주시립미술관 박은용 회고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