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시간 ; 류현자의 ‘사모곡’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영재 작성일20-08-22 18:14 조회1,820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류현자 <사모곡20-20>, 2020, 한지에 분채, 53x46cm 인연의 시간 ; 류현자의 ‘사모곡’ 류현자 개인전 ‘사모곡-觀’ / 2020. 9.1~19 / 금봉미술관 아름다움과 생의 근원 시리도록 고운 흰 빛의 버선을 켜켜이 쌓아 올린 류현자의 작업이 그저 단정한 미감에 그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화폭 안으로 품어낸 그 절절한 마음이 무엇보다도 크고 소중했기 때문일 테다. 30년 가까이 화업을 지속하고 있는 류현자가 붓을 들기 시작했던 시기는 20대 중반 즈음이다. 글씨를 쓰고 싶은 마음에 우연히 연진회 미술원에 발을 디딘 작가는 그 곳에서 두 해 동안 먹을 다루며 문인화를 익혔다. 이후 대학에서 한국화를 전공하며 채색화를 비롯한 다양한 기법들을 접한다. 작가의 초창기 작업의 테마는 자연이다. 전통 한국화의 소재에 천착했지만, 실경이나 관념산수의 틀이 아닌 근원성과 조형미 탐구로서의 자연을 대하며 <네모산수>란 이름의 작품들을 이어간다. 주로 산의 모습을 부감하여 네모 형태로 추상화시켰는데, 종이죽 기법으로 반 부조 형식의 물성을 가미해 특유의 질감을 형성한다. 현대적인 조형성에 비해 채색은 전통의 방법을 따른다. 스무 회 정도 여러 번 분채를 올려 은은한 색감을 자아내는데, 형태의 추상성에 묻히지 않는 류현자 화풍의 깊이는 이 전통적인 채색 기법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시리즈 초기에 목련꽃과 달, 미인도 등의 구체적 형상을 비구상 형태의 산과 함께 병치했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순수 조형성에 집중하며 더욱 함축된 화면을 구축한다. 10여 년간 진행한 작가의 절제된 산수 작업은 2008년부터 버선을 소재로 한 <사모곡> 연작으로 전환된다. 기존의 폐한지를 이용한 부조 형태의 작업 방식은 주요 기법으로 이어지지만, 버선으로 인해 한국적 미의식은 더욱 배가 된다. 류현자의 버선은 소재주의적 접근이라기보다는 ‘어머니’라는 생의 근원에 집중한 결과이다. “버선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사모곡의 버선은 대체로 거꾸로 된 형상인데, 우리 어머니들이 장맛이 변하지 않게 장독대에 한지로 만든 버선을 거꾸로 붙였던 것에서 유래합니다. 가족의 건강을 비는 어머니의 소박한 기원과 간절함을 작품 안에 담고 싶었습니다.” 작가의 기억에 자리한 버선은 자투리 천으로 기워낸 닳고 닳은 어머니의 그것이었기에, 화폭 안의 버선은 군더더기 없는 형태로써 순백색의 호분으로 단장된다. 작가의 표현대로 무명 빛의 버선은 그렇게 순정한 어머니의 마음을 담아낸 상징물이 되었다. 더불어, 직선과 곡선,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버선의 뛰어난 조형미는 오방색 위주의 배경색과 어우러지며 단정한 느낌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작업적 내용과 형식의 일치감은 사모곡 연작의 장점이자 힘이다. 한편, 작가는 작업에 내용적 충실함을 주기 위해 서사성이 가득한 소재를 고안한다. 버선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연꽃이 그것인데, 연꽃은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작품의 주제에 깊은 서정성을 부여한다. 진흙 속에서도 맑은 꽃을 피워내는 연꽃은 꽃이 피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다. 생의 절정이기도 하는 시기, 가족을 위해 목적 없는 헌신을 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삶은 연꽃과 참 많이도 닮았다. 인연을 되돌아보며 한 해가 완숙해지기 시작하는 9월에 류현자는 ‘사모곡-觀’이라는 주제로 스물한 번째 개인전을 선보인다. 지속해온 사모곡 시리즈의 연장이지만 전시 부제에서 보이듯 그동안의 작품을 되돌아보는 의미가 크다. 도식화된 버선의 조형미와 함께 여성을 상징하는 꽃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작품이 주를 이루며, 대작과 병풍, 그리고 선면화의 틀로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한 자 한 자 사경(寫經)한 작품들을 망라한다. 체력의 부담도 있었지만 작가는 몇 해 전부터 기존의 한지를 이용한 부조 형식의 작업 방식을 접고, 평면회화로 기법의 변화를 주었다. 보다 설명적인 형상과 부드러운 색감으로 변화했는데, 근작에서 도드라지는 다완, 달 항아리, 토기와 같은 물상은 그것대로 담박한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화면 안에 등장하는 꽃은 자주 다뤄온 연꽃과 목련이다. 정갈한 눈맛을 선사하는 이 꽃들은 단순히 꽃말을 나타내거나 오로지 보이는 대상으로써의 꽃, 혹은 그 외형을 찬미하기 위한 장식적 성향의 소재가 아닌, 작가 나름으로 어머니를 향한 지극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적 대상이다. 버선이 일상 안에서 가족의 안녕을 비는 어머니의 자애(慈愛)이자 근원의 생명력을 뜻하는 것이라면, 목련과 연꽃은 소재 자체로 어머니를 상징한다. 각각 여성의 삶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삶을 지칭하며 사모곡이라는 큰 범주의 서사를 보완한다. 창작이란 본시 그 주체의 삶이고 화업이라는 여정에서 파생하는 무수한 사유와 인식의 결과들이 일종의 표현 행위로써 드러나지만, 인연의 고리에서 바라볼 때 삶과 창작의 조우는 필시 의미 깊은 관계맺음이다. 어머니의 낡은 버선, 찬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부뚜막에 올린 정화수, 서툰 글씨로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진 어머니의 금강경은 모두 딸의 삶에 각인되었다. 딸의 심중에선 일면 안타까운 엄마의 삶이지만, 그 또한 외면할 수 없는 시간이기에 이내 화가의 업을 통해 달리 말하면 본인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작가는 엄마의 마음에 다가갔다. 더불어, 그러한 ‘이해’의 행위는 어느새 스스로에게 모종의 수행이 된 듯하다. 한지에 분채로 촘촘히 올린 색은 과하지 않은 자연의 성질 그대로를 닮았고, 십년 동안 행해온 사경은 순간순간이 세속의 번뇌와 무수한 생각들이 비워지는 무념무상의 시간이 되었다. 사모곡의 초기 성향에 비해 힘을 많이 덜어낸 평면 작업은 작가 스스로도 변화의 과도기에 있는 흐름으로 간주한다. 반부조 형식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색을 올리는 행위, 불경의 한 글자 한 글자를 찬찬히 써내려가는 행위는 모두 작업에 대한 욕심을 비우고자 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담보하면서 외려 작업에 밀도감을 부여했다. 그러나 형상성이 배가된 평면회화에서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적 장치들이 덧붙여지며 작가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밀집된 에너지가 다소 분산된 느낌이 든다. 각각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명상을 뜻하는 색색의 물결 모양 띠와 다완, 그보다는 엷은 물빛과 쪽빛 밤하늘에 가득 찬 만월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꽃과 버선으로 한 데 어우러지는 형국이 더욱 작가답고 친숙하다. 그간 류현자는 절제된 구성미와 형식미, 또한 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써 원활한 소통을 꾀해왔다. 무엇보다 작가의 작업세계를 키운 것은 팔 할이 그의 삶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보게 됩니다. 부족한 모습 또한 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또 다른 작업적 변화를 준비하는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는 과정에 있다. 긴 시간을 갈무리하고 이제 새로운 질문을 던지려 하는 류현자의 작업세계가 올곧게 자신의 이야기들로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그로 하여금 작가가 밟아온 수많은 인연의 시간이 아름답게 빛날 수 있기를 더불어 바라본다. - 고영재 (독립큐레이터), [전라도닷컴] 2020년 9월호 류현자 <네모산수 05-7>, 2005, 한지에 분채, 53x46cm 류현자 <사모곡>, 2010, 가변설치, 한지에 분채, 사경 류현자 <사모곡11-4>, 2011, 한지에 분채, 91x73cm 류현자 <사모곡-연14-21>, 2014, 한지에 분채, 117X91cm 류현자 <사모곡-그 숲에 들다1>, 2018, 가변설치, 한지에 먹, 분채, 사경 류현자 <사모곡 20-18>, 2020, 한지에 분채, 50x50cm 류현자 <사모곡 20-13>, 2020, 한지에 분채, 61x72.5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