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위한 제의와 회복' 정경래 초대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병헌 작성일19-11-23 15:12 조회2,084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정경래 <도시 숲을 거닐다>, 캔버스에 유화, 166x122cm ‘마음을 위한 제의와 회복’ 정경래 초대전 2019.11.20.-11.30 / 갤러리S 마음을 위한 제의(祭儀), 그리고 회복(回復)의 길 정경래 작가가 그린 일련의 작품들을 보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무언가를 건드리는 어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든다. 그리고 그 감정은 자꾸만 그의 작품들에 눈이 가도록 만들면서 가슴 먹먹해지는 묘한 경험을 수반하도록 이끈다. 대체 이것이 무얼까? 어떤 작품들을 감상할 때 그 작가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에서 작품만을 보고도 만족스러운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작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정경래 작가는 필자가 보기에 작품만 보더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조금 더 작가를 알면 훨씬 도움이 되는, 즉 전자도 아니고 후자도 아닌 묘한 경우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조금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풍경화나 인물화, 그리고 전통적인 목재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은 모두 유화 특유의 기법들을 사용하여 제작된 것으로서 이런 그림들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서양화라고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그가 본래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던 작가라면 모두 놀라워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왜 동양화를 그렸던 사람이 서양화를 이렇게 잘 그리지?라며 또 한 번 놀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왜 서양화로 전향을 한 것일까?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동양화가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명맥을 이어가야 할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너무나 전통적인 그림이 높은 정신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큰 호소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통 회화가 어떻게 현대적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에 대해 늘 고민을 했던 것이며, 그 하나의 대답으로서 현대화의 대표적인 서양화의 기법을 이용하여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전환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문화를 단순히 서양화의 기법만으로 담아내기에는 둘 사이에 커다란 균열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고려의 불화나 조선 시대의 풍속화, 나아가 문기 짙은 산수화에서 표현되고 있는 그 고유한 정신세계를 담아내기에는 서양화라는 그릇이 얼마나 이질적인 것인가? 다시 말해서 동양화만이 간직한 맛과 멋은 서양화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필자가 보기에 정경래 작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고민을 했던 것이며 그의 작품들은 그와 같은 고민들에 대한 작가만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의 답들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그의 작품들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일련의 <어머니> 시리즈일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몇십 년 전 시장통이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작가를 포함한 우리나라 어머니의 얼굴이다. 작품 속의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 밤늦도록 일하시면서 정작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않은 그런 어머니이다. 이름만 불러도 아련해지는, 모습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어머니. 얼굴 가득 뒤덮인 주름 속에서 온갖 삶의 질곡이 묻어나는, 그런 모습으로도 우리들을 위해 환하게 미소짓는 사람. 그의 작품 속에는 그런 어머니가 모셔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작품 속 어머니를 대하면서 애잔함, 아련함, 먹먹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느끼는 이와 같은 감정들은 서양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일 터이다. 물론 그들고 슬픔과 연민, 그리움, 아련함 등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것은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우리는 무언가 다르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정이 많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가 노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걱정한다. 그가 이와 같은 우리 고유의 정서를 단순하게 서양화의 기법만을 써서 기교적으로 풀어내기에는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특히 어머니의 모습을 그릴 때면 경건한 마음으로 제의를 지내듯이, 그리고 산고의 과정을 겪는 것처럼 정성을 담아 쌀을 한 톨 한 톨 어머니의 얼굴 위에 부착한다. 이와 같은 과정은 마치 탱화를 그리기 위해서 매일 아침 108배를 하며 몸과 마음을 수행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쌀 한 톨에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는 어머니를 떠올리고 쌀 한 톨에 우리네 삶을 떠올리고 쌀 한 톨에 자신을 되돌아본다. 갈수록 각박해져만 가는 이 사회에서 우리 고유의 정과 어머니의 마음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의 작품 속에서처럼 도심 속의 밤거리에서 아련하게 새어 나오는 빛이 유독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오래된 목재 가구 위에 그려진 투박한 사발과 붉은 꽃송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뼈아픈 질책과 간절한 호소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그의 작품들은 우리의 가슴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희미하게 깜빡거리는 무엇인가를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 말을 걸고 있는 듯하다. 혹독한 눈보라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장면을 보고서 소중한 무언가를 떠올리도록 말이다. 그는 오늘도 이와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경건한 제의를 지내고 있으며 산고의 고통으로 얻은 작품을 통한 회복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 김병헌 (미학, 독립큐레이터) 정경래 <삶이란>(연작), 캔버스에 유화, 쌀 정경래 <숨결III>, 고재에 저부조,유화, 41x75cm 정경래 <숨결II>, 고재에 저부조, 유화, 41x75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