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라진 욕망의 잔흔' - 신창운 개인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8-06-23 17:43 조회2,674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바스라진 ‘욕망의 잔흔’ - 신창운 개인전 2018.06.20-06.28 / 은암미술관 Animula vagula blandula (방황하는 가련한 영혼이여) 어떤 것이든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게 보여진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심리적 변화를 유도하는 고도의 공감각을 타고났다. 신창운은 작품으로써 사회의 견고한 시스템을 마주보게 해왔으며,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법을 점차 잃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체로서 사유하게 하는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왔다. 신창운 작가가 그간 공개하지 않았던 작품을 보며 토론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연락이 왔을 때, 설레임과 기대를 안고 신창운의 작업실을 방문하였다. 작업실 가득 펼쳐진 작품을 마주한 순간, 묘한 먹먹함과 차분함이 일었다. 이 미묘한 감정은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신창운의 과거 작품에는 나와 타자와의 관계, 강자와 약자의 위계, 정의와 부조리의 문제와 같은 대립항들이 기저에 깔려있다. 다소 무거운 주제의식은 기실 그의 가슴 아픈 가족사에 기인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청산하지 못했던 역사문제는 전쟁을 통해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좌익과 우익의 기형적인 이념갈등은 국가에 의해 또는 개인에 의해 무고한 양민들의 대립과 희생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권 당시 마을이장이었던 신창운의 조부는 농촌계몽을 위한 진보적인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되어 하룻밤 사이에 경찰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의 조모 역시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신창운의 가계에는 말 못할 아픔과 상처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통상 작품에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개념적 메시지와 함께 작가 특유의 정서도 드러나게 마련인데, 그의 작품에서 번뜩이는 예리함과 우울함이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감수성이 숙명처럼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동안 탐구해온 사유의 결과가 욕망의 상념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다 못해 활활 타오르는 욕망의 태양으로 표현되었다면, 이번 은암미술관 초대로 진행되는 ‘욕망의 흔적(Trace of Desire)’이라는 주제의 작품들은 욕망으로 불타올라 바스라 진 허위의 잔흔에 대한 이야기다. 바스라 진 욕망의 잔흔에 대한 성찰 “Desero ergo sum(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욕망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기 보다는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욕망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의 본질에 대한 인식은 부족했다는 것이다. 신창운의 최근까지 지속해왔던 ‘욕망(Desire)’ 연작은 욕망의 본질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와 성찰의 결과물이다. 현대사회, 즉 자본주의는 보다 나은 삶을 위해 가능한 ‘과(過)’하게 재화를 소비하라고 부추긴다. 우리의 삶을 애초부터 결핍으로 규정하고, 지속적인 광고와 마케팅 전략을 통해 환상과 허위의 성채를 견고하게 구축한다. 구성원의 결핍과 공허함을 먹이로 유지되는 자본주의에서 만족이라는 감정이 구현될 수는 있는 것일까? 얻으면 곧 공허해지는 끝없는 뫼비우스의 순환을 파해(破解)할 수는 있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생물은 각자의 언어로 소통한다. 하지만, 다른 종(種)과는 다르게 인간은 언어와 상징을 통해 가상체계를 구상하기도 한다. 가상체계, 즉 허구는 인간의 지적 승리로 비견되지만, 사실 그것의 군림을 추인할 뿐이고 종속의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욕망이 만들어낸 가상체계는 견고하다. 전 지구적으로 구축된 가상체계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았듯이 너무나도 치밀하여 어느 누구도 그것이 가상임을 눈치 채지 못한다. 만약 구성원들이 이 허상의 질서를 인지한다면 그 체계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가상의 인지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신창운의 작업이 견고한 것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인문·사회학적 연구와 창작자로서의 성찰적 사유가 치열하기 때문이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표현문화는 한 개인의 독립적이고 탈사회적인 창작물이라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다양한 조건 속에서 추출된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학에서는 예술을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작품의 심미적 측면만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문화적 의미까지 총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신창운, 2010, 시각예술에 대한 예술인류학적 제언)” 그는 단지 작품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객관화된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관조한다. 나와 세계를 분리하여 타자화 하고 내가 속한 세계가 가상체계이므로 스스로를 객체화하여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이는 미술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함으로써 체득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성작가들과는 다른 인문학으로의 낯선 행보는 그의 작품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예견되는 지점이다. 신창운의 과거작품에는 객관화된 한 개인으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의식에서 추출한 그의 깊은 통찰력은 작품을 통해 사회적인 메시지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2008년 인도 유학시기부터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별적 일원이 아닌 좀 더 큰 범주 안에서 인간의 욕망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찌할 바 모르는 욕망들이 뒤엉켜 빛을 발하는 태양. 그 주변으로는 암흑뿐이다. 그는 욕망의 상념들과 생명의 본질인 빛을 대조시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덩어리로 표현하였다. 이 덩어리는 멀리서는 생명의 산실인 태양으로 인지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연 속 우굴 거리는 욕망의 정념들로 가득하다. 작품 바깥에서 보는 외부자의 시각에서는 평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 내부에는 묘한 긴장과 불안이 내포되어있다. 수많은 도상과 상징들이 뒤엉킨 알레고리는 큰 덩어리와 가는 선 그리고 면으로 겹쳐지며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이러한 중첩성은 나와 사회 사이에 켜켜이 누적된 각종 욕망의 사슬로 감지된다. 작품 외면에 표현된 형식적인 아름다움은 허상으로서의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이다. 신창운의 작품에 등장하는 힌두교의 신 역시 허상이다. 힌두교는 하나의 신을 위한 단일 체계가 아닌 다양하고 복합적인 믿음체계를 수용하는 종교다. 힌두교도들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신을 상정하고 숭배함으로써 실체화한다. 인간의 욕망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신의 형상도 셀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수없이 많은 신은 우주를 창조한 브라마의 다양한 현현들이다. 이러한 논리를 연장하면, 우리의 무한한 욕망도 실존하는 그 어떤 실체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실체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신창운은 그동안 화려한 색조와 그라데이션 기법을 통해 욕망의 강렬함과 그것의 이중성을 표현한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였다. 사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 역시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지만, 매체와 기법은 완전히 다르다. ‘욕망의 흔적’ 연작은 화려하게 불타올랐던 욕망의 상념들이 바스라 진 후 남은 공허한 실체에 대한 집요한 사유의 결과물이며,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오브제작업과 회화작품들이다. 하루 하루 일기를 쓰듯 그려왔다는 ‘흔적’ 작업은 우리를 현재로부터 과거, 즉 선사시대로까지 이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소비되고 강제되는 몸, 지식의 독점과 조작을 통해 인류의 삶을 처참히 짓뭉개버린 절대 권력, 신성으로 위장한 부패한 종교, 환상과 허위를 주입하는 자본주의와 대중문화 등 그는 시간을 거스르고 시대를 통찰해 인간의 욕망을 추출해 낸다. 화면에 정교하게 표현된 오브제는 옛 영화를 잃고 생명력이 소실되어 박물관 한 켠에 유물로만 존재하는 것, 형태는 유사하지만 다른 목적으로 전이되는 것, 같은 기능을 지녔지만 소유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들로, 오브제의 위치와 역할에 따라 낯설게 해석되는 다중적 메타포를 효과적으로 포착하였다. 인간은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상상의 완벽한 존재, 즉 이데아를 상정하고 동경했지만, 결국에는 그것에 종속되었다. 실용성은 퇴색되었지만 계급적 상위개념을 상징하는 석검. 어느 누구에게나 경외감을 불러일으켰을 오벨리스크와 불상 그리고 금동대향로. 이들은 가상의 이데아에 속해 있다가 그 체계가 무너지자 단순한 사체로 전락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욕망의 사체로 변해버린 잔흔 속에서 욕망의 불씨를 되살리려 노력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시공을 초월해 당대의 상황을 대면하는듯한 경험을 하게 되고, 어느 순간 사념이 사라진 청정한 곳에 우리가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의식의 유영은 오브제 자체에 내재된 시간의 퇴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창운 작가 특유의 섬세함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그는 타다 남은 숯의 바스라질 것 같은 질감을 고스란히 화면에 옮겨놓기 위해 틈틈이 숯을 구워 다듬고 질감을 연구했다. 구도(求道)적인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다소 난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왜곡된 욕망과 허위에 대한 메타포를 일관되게 탐구해 온 점을 염두에 둔다면 신창운의 생각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다가온다. 신창운에게 있어 ‘흔적’ 작업은 고독한 자신에 대한 위안이었으며 자가치유적 의미가 짙다. 메인작업 후 잠시 머리를 식히는 의도에서 진행된 이 작업은 일종의 기도이자 상처받은 자신과의 대화였다. 작업의 휴식을 위한 작업, 신창운은 분명 성실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맺는 글 이번에 선보이는 ‘욕망의 흔적’ 연작은 신창운 작가가 작업실과 노동현장에서 찾고자 했던 실체의 본질에 대한 성찰의 흔적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작품의 형태를 두고 그의 기존 작품과 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바스라 진 흔적으로 느껴지는 이번 작품들은 욕망의 잔해로서 화려함 속에 내재되어 보이지 않던 심연이기 때문이다. 마치 연기(緣起)와 같아 무엇이 먼저고 후에 오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서로 닮아 있고, 서로를 구성한다. 어느 하나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이유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