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현대미술의 등불- 부샹파이 展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허경 작성일19-01-09 10:54 조회3,254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영혼의 눈으로 사유한 화가, 부샹파이 - 베트남 현대미술의 등불을 밝히다. 2018.12.19.-2019.1.26. / 나인갤러리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하노이의 고풍스러운 풍경을 사유의 시선으로 담아낸 이가 있다. 그의 작품은 크기와 소재를 불문하고 필선의 움직임에서 감정의 파동이 느껴진다. 평범한 풍경이라 치부하기엔 짙게 배어 나오는 색채와 형상화된 밀도감이 예사롭지 않다. 그림의 주제인 하노이 거리는 ‘항(Hang)’이라는 글자에 거리별로 취급품목이 결합되어 Hang Bac street, Hang Ma street, Hang Giay street 등 36개의 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른바 하노이 지역의 ‘36거리’는 비슷하게 생긴 골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100년 넘은 건물들과 함께 전통도시의 면모를 보여주는 옛 거리이다. 화가는 하노이에서 태어나 비엣박(Viet Bac)에 거주했던 짧은 기간과 하노이 폭격기간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작품, 하노이 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한다. 매일 오후 회색셔츠와 갈색 재킷을 입고 하노이의 거리를 산책하던 한 화가가 있다. 화가는 혼잡하게 붐비는 하노이 도시의 건물들 사이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강렬한 햇빛을 가르며, 때로는 비가 그친 뒤 먼지가 씻겨나간 황량한 거리를 홀로 거닐었다. 시장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원뿔 모자에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과 수줍게 마주친다. 화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거리의 이웃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묵묵히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은 좁은 골목길을 지나 개성이 넘치는 작은집 앞에 이르자 따스한 온기를 남기고 사라진다. 베트남 화단에서 ‘국민화가’로 추앙받고 있는 부샹파이(Bui Xuan Phai, 1920-1988), 그는 시대적 고뇌를 독창적인 미감으로 승화시킨 베트남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힌다. 시인인 양 투옹(Duong Tuong)은 “어떤 이가 피카소의 세계(Picassian), 체홈의 세계(Chekhovian), 랭보의 세계(Rimbaldian)가 존재한다고 말하듯이, 파이의 세계(Phaian)가 존재한다”고 단언한 바 있다. 부샹파이는 베트남 격동기를 관통하는 제1세대 서양화가로서 근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대가이기에 그의 회화세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베트남 현대미술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베트남은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19세기 중 후반부터 프랑스 지배를 받았으며 1946년부터는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공산화되었다. 이후 북베트남과 미국과의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어 1975년 베트남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수차례의 참혹한 전쟁을 거듭해야 했다. 일찍이 프랑스의 근대미술교육을 받아들이고, 러시아의 사회주의 미술을 흡수한 베트남 미술은 자국의 유구한 전통 문화에 독자적인 표현세계를 접목시켰기 때문에 동아시아 현대미술에 있어서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1990년대에 소개되기 시작한 베트남 현대미술은 시기적으로 인도차이나 미술(1925~1954),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1954~1980)로 나뉜다. 이후 1980년 개혁을 상징하는 도이 모이(Doimoi) 선언 이후 과거의 획일적인 미술에서 벗어나 사회문제와 개인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표출하면서 2000년대에 세계적인 관심을 이끌어냈다. 베트남 미술이 움트던 첫 번째 시기를 일컫는 인도차이나 미술은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던 1925년, 프랑스가 하노이에 설립한 인도차이나 미술학교(EBAI, Ecole des Beaux Arts D'indochine)로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부샹파이는 베트남 현대회화의 산실인 인도차이나 미술학교 출신으로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등 서양의 조형어법을 받아들임으로써 베트남 화단에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북 베트남이 승리한 이후 정치와 미술을 결합시킨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이 우세해짐에 따라 추상화, 누드, 자화상 등은 퇴폐적인 미술로 간주된다. 더욱이 공산주의 사상과 선전이 권고되면서 외부세계에 관한 미술정보와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은 제한되었다. 1957년 정부가 강요하는 그림을 거부한 까닭에 부샹파이는 하노이 미술대학 교수에서 해임되었고 배척받는 화가의 길을 걸어야 했다. 예술가에게 강한 추종을 요구하던 공산정부 체제는 부샹파이에게 1984년까지 전시회 금지령을 내렸다. 때문에 이전에 발간된 베트남 미술관련 책자에서 그의 이름과 작품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전쟁과 빈곤의 이중고를 겼었던 그는 1984년 11월, 비로소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함으로써 유화, 과슈, 목판화 등 108여점의 작품들을 전시할 수 있었다. 부샹파이의 순수한 예술과 인간적인 성실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전후 하노이 거리를 비롯하여 산 풍경, 바다와 호수 경치, 자화상, 초상화, 누드, 정물, Cheo(베트남 가극) 등에 이르기까지 인식의 범주에서 간과되었던 평범한 풍경, 일상을 주제로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였다. 그 결과 1980년대 말 베트남이 개방정책을 펼쳤을 때 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화가로 부상하였다. 부샹파이는 1988년 병상에 누워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고 예술의 순수한 열정을 불태웠다. 이러한 그의 열정은 사후 ‘거리의 파이’, ‘불멸의 화가’, ‘베트남 미술의 전설’이라 불리며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세계미술시장에서 베트남 화가 중 최고가를 기록하며 찬사를 받고 있다. ‘영혼의 눈으로 사유한 화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전시는 하노이 거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인물, 정물을 묘사한 드로잉, 과슈 등 50여점을 선보인다. 그가 그린 드로잉들은 캔버스와 값비싼 미술도구를 구할 수 없었던 까닭에 성냥갑, 또는 버려진 작은 담배갑, 봉투, 신문용지, 교과서 종이, 판지상자 등에 그려져 더욱 눈길을 끈다. 부샹파이의 전 생애를 담보한 작품 속에는 공산 치하의 어둡고 쓸쓸한 하노이 거리, 자국민을 향한 그의 애수어린 시선이 녹아있다. 무엇보다 부샹파이는 하나의 주제에 대한 변주곡을 어느 대가보다도 다채롭게 표현했다. 이를테면 내적심상이 드러나는 자화상은 반 고흐를, 두꺼운 윤곽선과 세밀한 필선은 피카소와 마티스를, 거리의 풍경묘사는 몬드리안과 클레를, 단순하게 표현한 인물들은 박수근과 이중섭에 견주어 볼 수 있을 만큼 풍요롭다. 예술평론가 타이 바 밴(Thai Ba Van)은 만약 부샹파이가 없었다면 베트남 미술은 어찌되었을까? 그가 없다면 “베트남 미술사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겼을 것이고 그 어떤 곳에서도 하노이 거리의 정신적, 물질적 형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당신의 영혼이 어떤 하나의 창문을 갈망한다면 영혼의 눈으로 사유한 화가, 부샹파이의 작품을 들여다보라. 베트남인들의 일상과 풍경을 기록하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성찰해 온 부샹파이, 그는 베트남 현대미술의 등불이 되어 그들의 영혼을 맑게 비추고 있다. - 김허경(미술비평)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