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의 공동체, 걸판진 육체의 향연' 서현호 개인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사라 작성일18-12-11 18:20 조회2,681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무위(無爲)의 공동체, 걸판진 육체의 향연 서현호 개인전 ‘Dancing with Karma' 2018. 12. 07 - 2019. 01. 11 / 산수미술관 허상과 허위를 걷어낸 날 것의 나체는 갓 잡은 생선처럼 파닥거리는 생명력을 분출한다. 이성이 아닌 감성, 문명이 아닌 자연, 화면 안은 원초성의 극단이다. 자본과 욕망, 인간을 점령하고 옥죄는 것을 벗어 던지고 해방구로 향하는 격한 움직임들…. 그 육체의 걸판진 군무(群舞)는 대동 세상을 염원하는 몸짓이다. 무위의 공동체를 꿈꾸는 인간들이 있다. 서현호의 근작은 ‘육체’와 ‘춤’에 대해 천착한다. 서현호가 정의한 육체는 이성의 제약에서 벗어난 감성과 원초성의 표상이다. 목적 지향적이 아닌 즉흥적이며, 뜨거운 상호 작용이 가능하다. 한번 새겨진 몸의 기억이 지닌 무한성은 또 어떤가. 아이가 수 천 번 넘어지면서 걸음마를 배우고, 한번 익힌 자전거가 몸에 화석처럼 각인되어 훗날 페달을 밟을 수 있듯 말이다. 그리고 몸은 솔직하다. 몸이 뇌보다 먼저 반응하고 위기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대처한다. 몸의 미세한 움직임들은 감성과 경험의 솔직한 반영들이다. 이처럼 인간에게 몸은 감각이며, 솔직하며 원초성의 주체이다. 이는 춤의 특성과도 연결된다. 인간의 유희적 본성이 문화적으로 표현된 것이 축제이며 축제의 절정이 춤이라 할 수 있듯, 춤은 육체의 자각이다. 음악사가이자 무용사가 쿨트 작스(C. Sachs)가 선사시대부터 무용이 고등예술로 발달했다고 주장하듯 여타 예술 장르 및 과학의 발달 이전에 육체의 예술은 이미 만개하고 있었다. 그만큼 춤은 오로지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인간의 ‘내적 생명’을 묘사하는 최적화된 예술이었던 것이다. <Dancing for me> 시리즈는 춤을 추는 나신의 여인이 등장한다, 왜곡된 신체의 형태는 역동감과 율동감을 배가시킨다. 길게 뻗은 팔과 다리는 화면 밖까지 확장되어 에너지를 외부 세계로 분출한다. 무녀의 내적 감흥이 화면 가득 달아오른다. 생략된 배경은 몸의 언어를 통해 보여 지는 무녀의 내면세계이다. 화면 가운데 거대한 상반신의 인간이 무녀를 바라본다. 작가는 “자화상”이라고 설명한다. 즉 자아인 셈이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이 분석한 사회적 가면인 ‘페르조나’(Persona)를 벗고 내면의 자아와 만나는 찰나로 해석할 수 있다. 원초성의 무녀가 자아와 마주하는 순간은 허위허식과 목적의식을 탈피한 무념무상의 포착인 셈이다. 춤은 몸의 ‘현상’이자 ‘실재’이지만, 그 찰나가 지나면 사라져버리는 ‘관념’이자 ‘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순간, 근육의 단단한 힘과 물리적인 힘이 상호작용하며 생명력을 화산처럼 뿜어낸다. 서현호는 앵글 안에 춤을 정지시켰다. 그래서, 한편의 ‘신화’(神話)가 됐다. 서현호 <백구와 춤을 I>, 2014, 캔버스에 유화, 53x45.5cm / <Dancing for me>, 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72.7x60.6cm #. 해방을 향한 몸의 의식 춤은 예술가들에게 오랜 소재였다. 19세기 후반 인상파 화가들은 파리의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 도시민의 일상을 포착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의 <도시의 무도회>, 에드 가 드가(Edgar De Gas)의 <푸른 옷을 입은 발레리나들> 등 작품 속 이들은 도시적 삶과 세련미가 느껴진다. 야수파 대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춤> 시리즈에서는 삶을 찬미하며 춤춘다. 그러나, 여기에는 날 것의 존재들이 자리한다. 서현호의 <춤추는 사람>, <Dancing for us> 시리즈는 인류가 창조된 태고적 아담과 하와처럼 원시성을 지녔다. 춤추는 남자와 여자는 몸이 엉키면서 화면 안을 채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남녀는 순환한다. 무채색 톤의 생략된 배경은 남녀를 더욱 극화시킨다. 거친 호흡과 리듬 속으로 빨려든다. 서현호의 춤은 이성이 구축해온 것으로부터 해방을 향한 ‘예배의식’이자 ‘굿판’이다. 인위적인 가치 판단, 사회 체제와 지배 규범, 자본으로부터 탈주이자 자연의 구성요소로서 인간 본연의 회복으로 해석 가능하다. 절대적 자유를 말한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이다. 이는 철학자 장 뤽 낭시(Jean Luc Nancy)의 ‘무위’ 개념과도 일맥상통하다. 낭시는 공동체의 조건으로 평등과 소통의 장소를 말하며, 그 장소야말로 인간을 규격화·정형화하는 윤리적·사회적 가치와 관념에 종속되지 않는 ‘무위’라 했다. 서현호가 구축한 화면 속 공간에 환치시켜보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무위의 환경이 반(反)자본주의의 대변일지라.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 부유하듯 춤추는 이들의 세상이야말로 해방된 공간이자 통합과 연대의 장이다. #. 적대에서 연대로…우리들의 ‘무위의 공동체’ 올해 시작한 ‘춤’ 시리즈를 한자리에 모은 <Dancing with Karma>전은 지난해 개인전 <자본주의적 우울과 욕망으로부터 탈주>에서 보인 이전 작업에서의 거칠고 직설적인 화법에서 벗어난다. 표현주의 형식에서 신체 왜곡과 붓의 터치를 완화시키고 은유가 지닌 메시지의 힘을 보탰다. 인간적 좌절, 분노, 불안의 짙은 그림자와 자본주의에 대한 적개와 날선 비판이 걷어지고 동화, 초월, 연대라는 미래지향적인 시선의 변화가 감지된다. 자칫 ‘예술적 교조주의’로 흐를 경계지점에서 작업적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40대 중후반 예술에 대한 열망과 갈증으로 광활하고 고독한 예술이라는 광야에 몸을 던진 작가는 악다구니로 그림을 그려왔단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미술의 자본화와 상품화”에 저항해왔다던 작가는 이젠 한결 편한 목소리로, 누구나 어울려 걸판지게 호사(豪奢)를 누릴 수 있는 춤의 소재를 빌려 연대를 말하고자 한다. 한 편의 군무를 보는 듯한 <파랑새는 있다> 시리즈에서는 연대의 기운이 묻어난다. 집단적 사람들은 춤을 추고, 엎드려 절규하고, 얼싸 안고 있다. 그러한 몸짓 위로 파랑새가 날아간다. 생략된 배경과 단순화된 인간과 새의 묘사, 화면 가득한 구도가 몰입도를 높인다. 나체의 군무는 민초들의 실천행동이다. 고된 생계의 나날에서도 ‘휴머니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한다. 이들은 파랑새를 염원한다. 파랑새, 즉 유토피아는 연대의 장이자 낭시가 말한 ‘무위(無爲)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한갓진 전남 곡성에서 밭일을 하며 자급자족하는 서현호는 노동을 유희이자 예술처럼 실천한다. 그래서 작가의 일상은 원초적이며 즉흥적인, 그리고 연대를 지향하는 그의 작품과도 닮았다. 예술과 삶의 일치를 꿈꾸는 서현호의 작품은 아이디어의 과잉과 난해함, 매체의 범람 등 동시대 미술의 현상 속에서 오히려 회화와 인간의 본질에 충실해 시선을 끈다. 지난해 민초들의 삶의 현장인 대인시장에서 518명의 이웃들을 드로잉하면서 공동체라는 화두를 던졌던 서현호는 개별적·개체적 삶을 넘어 소통하고 연대하는 주체가 되길 바란다. 오늘도, 그는 물질과 자본에서 해방된 ‘무위의 공동체’를 그리고 꿈꾼다. - 조사라 (미술학 박사·미술평론가) 서현호 <파랑새는 있다 II>, 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162.2x130.3cm / <무위의 춤 II>, 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120x80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