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을 통해 발생하는 연기(緣起): 윤세영의 ‘생성지점’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영재 작성일18-08-07 09:00 조회2,690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윤세영 <생성지점>, 2018, 한지에 먹,목화솜, 가변설치 소멸을 통해 발생하는 연기(緣起): 윤세영의 ‘생성지점’ 2018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빛’ 출품작 2018. 07.18 - 09.30 /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윤세영의 작품을 마주하였을 때, 마음 속에 먹먹함과 안타까움, 울컥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삶의 경험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실제성과 함께, 너무나도 익숙해서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던 우리 주변의 ‘당연함’에 대한 경외감과 미안함이 상기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감정이 윤세영의 작품과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시작지점이다. 윤세영은 대학원 졸업 후 전업작가로 활동하다가 엄마라는 ‘의무’를 위해 작품활동을 쉬게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작업을 이어가는 여성 작가를 찾기가 쉽지 않다.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는 문제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회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가 있다면 돌아올 사람은 돌아온다. 윤세영은 그런 사람이다. 윤세영은 자신과 주변을 통해 석과불식(碩果不食)하였고, 주변의 성장과 자신의 예술적 갈망을 느끼며 흐르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흐름은 곧 윤세영에게 있어 ‘시간’에 대한 감각을 형성하였다. 모든 흐름은 가역적으로,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다. 흐른다는 것은 진보하는 것으로 어떤 결과가 도출되든지 이익으로 작용한다.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그것이 경험으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흐름에 따르지 못하고 정지상태, 멈춰있다는 것만으로도 역행한다는 결과로 이어진다. 작가에게 있어서 잠시 멈춤은 뒤처지는 것으로 인지될 수 있으며, 그 감정은 주변과 비교되면서 강화되었을 수 있다. 역행의 경험은 작품에 반영되어 윤세영 특유의 시간과 감정의 흐름으로 표현된다. 이는 윤세영의 작품활동에서 엿볼 수 있다. 2012년 <그림자를 고호하다(Console your shadow)>, 2013년, <파랑波浪 차오르듯 (Waves Like being filled up over)>, 2014년 <모종(Plant a Seedling)>, 2015년 <Light in Blue thorn>까지 윤세영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시간에 바탕을 둔 ‘파랑(Blue)’과 모성에 기반을 둔 여성의 ‘감수성’이 된다. 내 작업에서 주로 사용되는 푸른색의 석채나 분채, 은분은 아교와 함께 수 십번 겹쳐 칠해야만 나타난다. 시간이 필요하다. 깊고 어둡다. 반면에 즉각적인 표현이 가능한 지점토는 가볍지만 생동감이 있다. 천연펄프가 주원료인 지점토는 단단한 조직의 한지인 장지와 아주 잘 결합된다. 평면과 입체,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대비되는 이 재료는 이면을 표현하기에 적절하다. (윤세영, 2013, 작가노트에서) 윤세영은 언어가 지닌 중의적인 특징을 예술가 특유의 공감각에 바탕을 둔 다의적 해석으로 치환하였으며, 언어의 모호성과 그것을 해석하는 지각의 불완전함, 남성과 여성으로 대별되는 사회 구조의 불합리함을 파랑이라는 색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파랑의 기조는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빛2018에서 선보이는 ‘생성지점 Becoming Space’에서도 이어진다. ‘생성지점’ 연작에서는 기존의 파랑에 더해 좀더 어두운 다른 색조를 함께 선보이고 있으며, 이는 확장된 작가의 사유가 색을 통해 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조와 애증의 파랑은 윤세영의 품안에서 감정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다. 기존에 주로 선보였던 파랑은 화면의 어느 지점에 이르러 뒤로 물러나고 있으며, 그 여백에는 깊은 어둠을 표현한 듯한 흑색이나 회색조, 그 지점이 부각된 가시들을 배치하였다. 화면의 구성에서 보면 멀리서는 단순한 정경으로 인지되지만 화면 앞으로 다가갈수록 모든 것이 소멸되어 가는 깊은 심연에 주목하게 된다. 심연 주변으로는 파랑과 전시장 조명으로 인해 더욱 강조된 가시가 예리하게 감정에 파고드는데, 감정의 생채기에 윤세영 특유의 서정이 중첩되어 호소력이 짙어진다. 윤세영 작품의 설득력은 익숙해서 당연해져버린 여성에 대한 인식의 불합리함과 자신의 체험에 기인한다. 이는 <어머니 Mother, 2015>를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다. 잉태부터 출산하기까지의 고통. 생성의 주체임에도 객체로서 존재하는 자아의 고뇌. 결국 존중받지 못하고 타자로 내던짐에 대한 호소로 읽혀진다. 작가가 평소 지녀왔을 ‘생성’에 대한 사유가 작품을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시점은 2014년 모종(Plant a Seedling)이다. ‘모종’은 생명을 파종하여 싹을 틔우는 ‘생성’의 아주 직설적인 표현이다. 생성은 없음(無)에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존의 어떤 것의 소멸을 통해 발생하는 연기(緣起)를 뜻하기도 하다. 이러한 인과율은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중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있으며, 윤세영의 작품에서 날카로운 가시로 표현되고 있다. 가시는 찔림과 고통이라는 직접적 의미와 함께 고통을 감내해‘간다’는 시간의 누적과 흐름이 포함된 가시(加時)이기도 하다. 윤세영의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파랑의 의미와 시간성은 오회(懊悔)을 극대화하기 위한 메타포로 존재하며, 상호간에 기능하여 작품의 깊이를 배가한다. 윤세영 <생성지점>, 2018, 한지에 석채, 180x240cm ‘생성지점 Becoming Space’ 연작에서는 윤세영의 사유가 색과 언어에 더해 공간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세영이 말하는 공간, 즉 지점은 특정 포인트일 수도, 작가내면의 은밀한 지점일수도 있는 불특정한 장소이다. 전시공간 메인에 배치된 대형작품들은 사유의 확장이 공간의 확장으로 표현되었다고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을 둘러싼 개인적·사회적 구조에 대한 관심과 생명의 근원 및 소멸에 대한 고민의 사유가 드러난다. 생성지점 연작 중에 먹으로 색올림한 대형 장지와 함께 공중에 매달린 오브제로 구성된 작품이 있다. 이 오브제는 얼핏 사람의 얼굴로도, 부정형의 형체로도 보이며, 어느 시점에서는 막 형성되기 시작한 태아의 모습으로 인지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눈 앞에 펼쳐진 먹 배경과 오브제가 분할하고 있는 공간구성은 나와 타자 간의 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 ‘하나’ 또는 ‘우리’로 인지될 수 있지만 실상 존재의 허상으로만 엮인 느슨한 관계이다. 작품 뒤편으로 드리운 그림자는 느슨함의 이면을 상징한다. 즉, 앞선 작품에서는 평면으로 구성되어 하나로 인지되었던 것들이 공간 속에서는 객체로 분화되며, 분화의 연결고리는 어느 한 ‘지점’을 통해 구축된다. 앞서 말했듯, 오브제의 그림자는 관계의 허상으로 인식되는데, 이러한 의도는 존재에 대한 해석과 맞닿아 있으며, 소멸과 생성이라는 개념을 수렴과 배출로 동치시킨 블랙홀(소생점)로 표현되고 있다.(중략) - 박영재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윤세영 <생성지점>, 2018, 한지에 먹, 130x259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