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남화의 큰 산 - 의재 허백련 특별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6-01-17 18:02 조회6,912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호남남화의 큰 산-의재 허백련 특별전 “본래 화품(畵品)이란 것은 기교가 있는 뒤에 그 기교를 초탈한 자유의 경지에서 나오는 법이다.따라서 선인대가들의 전통과 기교를 배우고 난 뒤에야 형상을 벗어난 영원한 생명의 자기예술이 가능한 것이다.나는 처음부터 내 그림이 없었다. 처음에는 미산(米山) 그림과 같았고 후에는 소치그림, 중국 황대치 그림과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내 그림은 미산 것도 소치 것도 황대치 것도 아니다.개성은 어디까지나 전통 위에서 꽃피워야 하며, 처음부터 자기 독단의 개성은 생명이 길지 못하다. 전통을 철저하게 갈고 닦으면 자연 자기 것이 생기게 된다.” 호남남화 화맥을 꽃피운 의재 허백련의 전통과 창작에 관한 지론이다. 의재의 회화세계와 예술정신을 살펴보기 위한 국립광주박물관의 특별전 [전통회화 최후의 거장, 의재 허백련] 전시에서 소개되고 있는 어록의 일부이다.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과 의재미술관(관장 허달재)이 공동주최하여 지난해 11월 24일부터 시작되어 오는 2월 21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의재를 통해 왜 남도가 예향인지를 되짚어보고자’ 광주박물관이 의재를 중심으로 호남남화 화맥을 입체적으로 조명해보는 특별기획전이다. 박물관 측은 ‘의재 허백련(1891~1977)은 남종화의 마지막 거장이라 불리는 근대 이후의 대표적인 전통화가이다. 남종화의 맥을 계승하고 최후의 꽃을 피운 그는 평생 선비로서의 풍모를 잃지 않았으며 늘 민족정신을 강조하고 실천했던 사회교육가이기도 했다’고 소개한다. 전시의 기획도 남화 화맥의 큰 흐름을 따라 제1부 ‘의재 허백련의 가계와 생애’ / 제2부 ‘의재 허백련의 사승과 교유’ / 제3부 ‘허백련의 예술세계’ / 제4부 ‘연진회와 의재 허백련의 제자들’로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전시작품들도 전통으로 대물림되는 허씨일가의 가맥은 물론, 의재가 남화에 입문하여 화업의 기반을 다지며 의재산인을 거쳐 무등산자락에서 예도를 닦으며 완숙기에 이르렀던 의도인 시기까지 시대별 주요 작품들, 그런 가운데 폭넓은 교우관계나 활동으로 연결되는 당대의 다른 대가들, 연진회를 화숙으로 선후배를 이루며 배출되어 현재 호남화단의 중진 청년세대를 이루고 있는 후학들까지 광범위하게 망라되어 있다. 의재 허백련의 예술세계 배경 전시를 통해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지만 허백련이 묵필로 세상에 이름을 얻는데는 무엇보다 이미 일가를 이룬 호남남화 집안내력의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그에게 정신적으로나 현실 활동에서 큰 힘이 되어 준 스승과 화우들의 격이 있는 인맥들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허씨화맥의 종조격인 소치 허련을 비롯, 미산 허형과 무정 정만조, 고무로 스이운 등 묵필과 예술정신을 형성하는데 큰 가르침을 준 스승들의 서화 묵적과 관련 사진자료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또한 서로 다른 화법이나 지향하는 세계의 차이와 상관없이 교유를 나누었던 채색세밀화의 이당 김은호, 농묵과 거친 필법의 소정 변관식 등 당시 한국화단 대가들의 묵필도 만날 수 있다. 특히 1927년 의재의 상경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이들을 포함한 13인의 서화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묵죽·묵란·괴석·잠자리 등을 그려넣고 화제를 써넣은 <의재선생환영기념합작도>가 있다. 이미 1922년 31살 이른 나이에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등 없는 2등상을 수상하고, 이후로도 계속 3등상과 특선 등의 입상과 함께 진주·대구·전주·부산 등지에서 전시활동을 하던 의재가 서울에 올라 온 것을 당대 명문가들이 환영의 자리를 만들고 즉석에서 이를 기념한 것이다. 이런 또 다른 기념합작품은 1950∼60년대의 <화훼>도 있다. 근대기 대표적 서화가로 손꼽히는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제당 배렴 등 7대가들이 각자 절지·난·목력·매화·괴석 등의 화제를 그리고 호를 써넣은 두루마리 형식의 합작품이다. 시기별 화폭의 변화 그러나 무엇보다 눈여겨 볼 부분은 의재의 전 생애에 걸쳐 시기별 주요 작품들로 모아 놓은 제3부일 것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1918년 일본유학을 마치던 해의 <산수>는 전형적인 중국 전통산수화법의 수련과정을 보여주는 예다. 근경의 계곡을 끼고 활엽수와 소나무를 굵고 진한 먹으로 다루고, 나무다리 건너 숲그늘 초막에 선비가 글을 읽고 있으면서 그 뒤로 구름처럼 바위산이 솟아올라 화면 오른쪽을 장중하게 채우는 북송부터 원·명대를 거치며 여러 시대 양식이 혼합된 중국의 고전산수화법이다. 이 그림의 화제로 ‘그림은 사물의 외형을 그리지만 요컨대 모양을 고치지 말아야 한다. 시는 그림 밖의 뜻을 전하지만 그림 가운데 운치가 있는 것이 귀하다’라고 중국 고서의 한 구절을 적었다. 이런 고전화법의 연마는 1924년 <계산청취(溪山淸趣)>, 1925년 <운사멱구(韻士覓句)>, 1926년 <천보구여(天保九如)> 등 초기작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원말 4대가, 명나라 송강파 등 여러 화법과 함께 <청산백수>(1926) <귀조>(1928) <청산백운>(1920년대) 등 엷은 먹을 촉촉하게 겹쳐 우려내는 미법산수가 많이 보인다. 이런 경향은 1930년대 들어 농담을 달리하는 세필 피마준과 태점들이 촘촘하게 모아져 경물과 초목을 이루면서 자연 풍광은 단단하고 명료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1936년의 <하경산수>, 1939년 <무릉도원>과 <석문도명(石門桃明)> <녹음비폭(綠陰飛瀑)>은 옛 고사나 중국 명작들에서 즐겨 다뤄지던 소재를 취하여 이런 필묵법을 뚜렷이 나타내면서 어느 시기보다 화사한 담채를 두드러지게 곁들여낸 화폭들이다. 이 시기는 1938년에 광주 금동에 정착하면서 연진회를 창립시키고 연진회관 건립을 위해 기금마련전을 연달아 열어 이듬해 회관을 여는 등 후학양성을 위해 대외활동에 더욱 힘을 내던 때이기도 하다. 의재 허백련의 회화에서 ‘의재산인’(毅齋散人)이라는 호를 쓰는 1940년부터는 필묵을 다루는 방식에서 스스로 변화를 의도한 것인지 먹과 필선에서 힘을 빼어 느슨하게 풀어놓거나 묽은 발묵을 올리는 경향이 많아진다. 1940년대 작품들인 <산중유거> <청풍명월> <추강어조> <고사관수>는 엷은 필선이 풀어헤쳐지거나 거친 부벽준을 쓸어 칠하듯 곁들여지고, 중앙박물관 소장 <산수>의 경우는 비온 뒤의 강변 풍경을 세세한 필선보다는 물기 많은 미점들을 겹쳐 촉촉한 먹기를 우려내었다. 이 같은 ‘의재산인’ 시기의 화법들이 집약된 것으로 12폭짜리 <사계산수>(1940년대)를 들 수 있다. 6폭씩 나누어 두 개의 병풍으로 만들어진 이 그림은 계절에 따라 맑고 간일한 필선과 담채를 곁들이기도 하고, 묵직한 농묵으로 잔뜩 습기를 머금은 산천을 묘사하거나, S자형 구도를 따라 농담과 굵기의 변화가 큰 필선과 반점들로 촘촘이 경물을 다지기도 하고, 가을이 깊어짐에 따라 필묵도 성글어지면서 이내 배경에 엷은 먹색을 깔아 하얗게 눈 쌓인 설경의 효과를 강조하는 등 시기별로 화폭을 달리 운영해 놓았다. 이 40년대는 의재 인생사에서 복잡다난했던 시기이다. 동생 목재 허행면과 고흥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를 경험하고, 해방 직전인 1944년에 양친이 모두 작고하셨으며, 해방을 맞아 조선미술건설본부, 조선미술협회 등 미술단체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또한 해방 후 공산당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점거되는 등 혼란스러워진 연진회관을 떠나 증심사 아래 오방 최흥종 목사로부터 물려받은 오방정을 춘설헌으로 개명하여 기거하면서 농업기술학교와 삼애학원을 여는 등 사회활동에 힘을 썼다. 이어 한국전쟁 중인 1951년 회갑을 맞으면서 ‘의도인(毅道人)’이라 칭하면서 ‘예도(藝道)’를 닦는데 더욱 열심하게 된다. 이 50년대 작품 가운데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강당 낙성 기념작으로 그린 <맹해서산(盟海誓山)>(1952)과 같은 시기 <산수>는 폭이 2.4m에 이르는 대작들이다. 크기도 크기지만 화면 오른쪽에서 중앙을 향해 웅대하게 솟구친 바위절벽이나 첩첩산맥들과 더불어 필선이 비교적 단단하게 다져져 화폭의 무게감을 더한 작품들이다. 1954년에 농업학교 운영의 의지를 담아 그린 <일출이작(日出而作)>은 근경과 원경의 산수경물 사이에 배치되던 강이나 바다 같은 수면공간 대신 배꽃 흐드러지게 핀 전답들을 배치하고 두 노부부가 소 쟁기질로 논을 가는 모습을 담았다. 태평성대의 상징인 순임금 시절의 ‘격양가’를 화제 삼아 그린 경작도이다. 만년인 1976년의 <대풍>이라는 작품과 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의재의 회화에서 가장 완숙기는 역시 1960년대 70년대일 것이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초대작가 또는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단군신전 건립운동(1969 추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는 등 비교적 생활도 안정되고 서화의 세계에 흠취해 볼 수 있는 시기였다. 광주시립미술관 소장의 <산수>에서 ‘낙엽은 모두 계류에 흘러가고 빈산에 가을빛만 가득 남았네’라는 말년의 속기를 털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내거나 <매화서옥>처럼 깊은 계곡 매화향 그윽한 곳에 대숲과 소나무 등을 벗 삼을 수 있는 이상향을 그리기도 하였다. (미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