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받들고 세상을 관하라 - 아산 조방원의 관폭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7-06-06 18:42 조회4,205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먹(墨)을 받들고 세상을 관(觀)하라- 아산 조방원의 '관폭도' 세상살이는 대개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무수한 일들과 인연들로 이루어진다. 애초에 풍요와 온후한 조건을 타고나는 수도 있지만, 지독히도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어 이내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푸른 잎과 꽃과 실과를 맺어내는 그런 인생이나 생명존재들이 의외로 많다.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때 되면 생멸을 거듭하는 듯한 자연이지만, 그들도 그냥 그렇게 거저 돌고 도는 것만은 아니다. 가는 길도 목적지도 서로 다른 사람세상에서 자신만의 가치와 지표를 두고 부단히 갈고 닦는 일상이 인생이 된다. 그런 삶 가운데 일생을 부단히 노력해도 도무지 쉬이 도달되지 않는 세계나 가치를 절감하게 될 때, 저절로 그에 대한 경외감과 열망과 겸허를 갖게 된다. ‘일생묵노 一生墨奴’ 평생을 먹을 탐구해도 다함이 없을 것이니 일념으로 그 먹을 받들고 자기를 연마하라.아산 조방원(雅山 趙邦元, 1926∼2014) 화백의 화업인생 절대 화두이자 제자들에게 건넨 추상같은 지표이다. 세상에 그림 그리는 이들은 부지기로 많지만, 예술인생에서 재료나 화구를 도구 이상의 절대 지존처럼 여기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평생을 벗으로 삼고 더불어 지냈더라도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려운 먹의 오묘함과 무한함, 갈고 다지고 풀어내도 무궁무진하고, 가슴의 형사나 손끝의 재능만으로 만만히 다뤄지지 않는 그 심오한 세상 오만색의 응결체에 대한 최대의 경외이자 겸허의 표현으로써 기꺼이 먹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한 셈이다. “흑색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버리는 색이다.”(2017 전시회 도록 중)라는 말이나, “노자의 사상을 색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수묵화의 먹색, 곧 현색(玄色)이다. 수묵화에서는 먹색을 하늘의 색이라고 한다. 눈을 어지럽히지 않는 무욕의 색, 이른바 무위자연의 도를 상징하는 색인 것이다.”([조방원 서화집] 권면사에서 발췌, 심미안, 2012)에 그런 생각이 압축되어 있다. 실제로 아산의 화폭에는 전통 필묵법의 흔적들과 함께 자유자재한 운필과 그에 따른 천변만화 먹빛들로 이루어진 화경이 펼쳐진다. 대부분 산수를 주된 소재 삼아 자연의 생동하는 기운을 화폭에 담아내는데 주력하지만, 역시 그림에서 탐구의 요체는 먹색이었다. 구도나 풍경의 차이들은 있지만 특정 활동 시기나 연령대별 구분 없이 심오한 먹빛과 이를 드러내는 운필, 그 필묵으로 이루어지는 화면의 공(空과) 기운을 여러 방식으로 시도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운필은 먹빛과 기운을 드러내는 방편인 셈인데, 엷은 먹을 넓은 붓질로 담담히 풀어놓기도 하고, 진하고 강한 먹색을 거친 파필로 빠르게 쓸어 치거나, 골짜기와 물줄기와 초목들을 먹의 농담을 맞춰가며 세세한 필치로 정성껏 묘사하기도 한다. 조방원 <고사관폭도>, 2000, 종이에 수묵담채, 57x142cm. 6폭 이번 전시된 작품 가운데 아산의 이런 ‘먹’에 대한 천착과 ‘생동하는 자연의 기운’을 함께 잘 보여주는 것이 ‘관폭(觀瀑)’ 또는 ‘관수(觀水)’다. 물론 관폭도는 예전부터 산수화에서 즐겨 다뤄지던 화제다. 당나라 시인 이백이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지었다는 ‘망여산폭포 望廬山瀑布’가 ‘관폭도’의 모태라고도 전하는데, 계곡절벽에 걸려 있는 시내 같은 폭포가 은하수처럼 삼천척이나 날아 떨어진다고 읊은(日照香爐生紫煙 遙看瀑布掛長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그 시심을 흠모하며 그림으로 옮겨내고자 했을 것이다. 더불어 동양화의 정신적 근간을 이루고 있는 노장사상에서도 물의 흐름은 자연의 순환원리뿐 아니라 세상이치의 함축이며 도의 상징이라 여겨 문인 지식인들이 심신수양으로 즐기던 자연관조의 여기문화이자 그림소재였다. 무위자연의 노장사상과 호연지기의 서화문화가 결합되면서 수많은 문인화가나 그들 취향을 따라야 했던 화원 화공들이 즐겨 다룬 관념산수의 대표적 요소인 셈이다. 아산의 산수화들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관폭’ ‘관수’ 소재들도, 정신성과 기운을 중시했던 그의 세상관조의 방편이라고도 여겨진다. 그림은 깊은 계곡 기암괴석 위의 선비가 폭포 아래서 물줄기를 완상하고 어린 동자가 한 쪽에서 차를 달이고 있거나, 물안개를 자욱이 일으키며 쏟아지는 폭포수나, 바윗골을 타고 부셔지고 파열하며 흘러내리는 계류는 전통산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본요소다. 그러나 아산의 그림에서는 나이든 중국풍 선비 일변도가 아닌 우리 식의 생활 속 인물의 모습이고, 친구와 담소를 나누거나, 벌거숭이로 멱을 감으며 폭포를 바라보거나, 선방에서 그윽이 폭포를 내려다보는 승려 등등 등장인물도 현실감 있게 다루고 있다. 또한 그 인물들이 폭포수를 위로 올려다보는 수직구도나, 직하폭포의 웅장한 기운 위주의 정형화된 전통그림들과 달리 인물과 물줄기의 높낮이 위치를 바꾸거나, 쎈 먹과 엷은 먹, 거칠고 강한 붓질이나 세세한 필치, 각이 지듯 날카롭거나 담묵으로 넓게 번지는 준법으로 바윗골을 잡아가며 단지 폭포의 힘과 장엄함보다는 물줄기가 이루어내는 기기묘묘한 변화 형세들과 폭포주변 골짜기 가득한 기운, 그 자연공간 속 계절 따라 달라지는 풍경 등 채워진 듯 비워진 듯한 화경으로 독자적인 화폭을 펼쳐내고 있다. “남종화를 무색계의 그림, 즉 본질을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그림이라 한다. 공(空)과 무(無는) 언제나 남종화의 화제다. 그래서 나는 그림의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다. 다만 기운생동만을 본다.”([조방원서화집] 발췌)는 생각이 그림에서 읽혀지는 부분이다. 아산의 화폭에서 전통의 탐구와 재해석, 독자적인 표현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이다. 옛 선인들이나 선대의 빼어난 역작과 화맥을 모본으로 삼되, 본질을 익히고 나면 그 방편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하고, 법식을 배웠으면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내어야 한다는 의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을 건넜으면 그 배를 버리라’(사벌등안 捨筏登岸)는 [금강경] 부처님 말씀이나, 아산이 흠모했던 석도(石濤)가 말한 ‘법이 없으면서도 법이 있다’(無法而法)을 자기화업에서 실천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아산의 그림에서는 전통 필묵법이나 산수화법들과는 달리 대범한 파격을 거침없이 행하는 화폭들이 많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산수자연의 그윽한 먹빛 아취보다는 거칠고 억세거나 단순 치기어린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이 또한 고전적인 문인취향 산수화의 관념을 배격하는 창작행위로 볼 수 있다. 중국 남송의 선승이면서 파묵과 일격의 수묵인물화로 손꼽히는 화가 양해(梁楷)를 높이쳤던 그는 “예술작업은 파문처럼 고저가 있는 법인데, 양해의 경우 승화된 경지가 있는가 하면 멍청하고 어리석은 듯 하기도 하다. 이 작가의 소박하고 서민적인 고아한 점이 무엇보다 좋다.”([조방원 서화집]에서 발췌)고 말하기도 하였다. 아산의 회화세계에 대해 이원복 부산박물관장은 이번 전시도록에 실은 평문에서 “고아하면서 거드름이 없고, 예스러우면서도 오늘과 소통이 가능한 그의 그림세계는… 제시(題詩)를 함께 하여 화면 구성요소의 공간구성의 묘(妙), 고아함과 더불어 미처 다하지 못한 뜻을 피력하기도 하고 그럴 필요가 없을 경우는 이를 빼버린다. 고답적인 산수화에서 풍경화적인 전이이다.”고 평하고 있다. 이번 아산 조방원의 유묵전은 ‘나그네를 기다리는 그 어느 산속의 집으로’라는 이름으로 광주시립미술관과 아산미술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여 5월 23일부터 8월 15일까지 열리고 있다.- 조인호 (운영자, 광주비엔날레 정책기획실장)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