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바람의 노래' - 석주 박종석 한국화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7-06-21 13:40 조회3,251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박종석, <영혼의 무게>, 2017, 35X59cm, 수묵담채 / <아유타야 사원>, 2017, 32X24cm, 수묵담채 / 박종석의 기행화첩 모음 ‘여행, 바람의 노래’ - 박종석 한국화전 2017. 6.20(화) - 6.30(금) / 갤러리 리채 “노마드(Nomad)의 삶, 문명(文明)을 탈피(脫皮)한 풍물기행(風物紀行)의 발자취” 한국화가 석주 박종석 화백은 ‘수묵담채(水墨淡彩)의 풍물과 여행의 기록’을 화첩에 담는다. 그는 농묵과 담묵의 바림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표현하는 데 신묘(神妙)함이 있어 마음과 손의 작용이 하나가 되는 ‘심수일체(心手一體) 또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상태’로 자신의 심상을 토해낸다. 따라서 그가 표현하는 색채는 형식에 얽매인 채색화의 법칙에서 벗어나 있어 자유롭고, 10대 중학 시절 학교 미술부에서 서양화의 구도와 색채를 접목시켜 한국화의 현대적 지향점을 미리 예고하였던 혜안이 있었던 점은 호남회화사에서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그는 주로 먹의 필선으로 인물이나 풍경의 윤곽선을 먼저 구획하고 채색하는 ‘구륵법(鉤勒法)’을 즐겨 사용하는데, 이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기보다 한참 전에 태동한 ‘선(線)의 예술’인 원시 토기에서도 주로 선택되었던 한국 전통의 화맥을 잇는 자연스러운 행위로 볼 수 있다. 또한, ‘파묵법(破墨法)’을 즐겨 사용하는데, ‘먹으로써 먹을 깨뜨린다’는 설명에 들어맞게 그의 삶도 기존의 것을 깨뜨리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이질적(異質的)이며 자유로운 화풍을 시도해 왔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인 것이다. 고교시절, ‘사서(四書)’와 ‘고문진보(古文眞寶)’를 공부하며 ‘한학(漢學)’의 기초를 다지기도 했던 그가 늦게 미술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한국화의 스승인 석성(碩星) 김형수 선생, 연진미술원 등의 전통 도제식 교육(徒弟式敎育)을 일찌감치 마친 이력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덕분에 박화백의 청년기인 90년대 초기, 당시 활동하는 남도의 수묵화 선배들과 어깨를 견주며 비등한 대우와 활동 범위를 갖게 되었고, 지역을 벗어난 전시로 꿈을 돌리게 된 계기를 맞게 된다. 특히, ‘세계 여행’이라는 소년 시절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한 것은 약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통 ‘남종화(南宗畵)’ 및 ‘사의(寫意)’를 추구하는 ‘문인화(文人畵)의 멋’ 속에서 현대적인 색채와 구도를 가미해 주로 ‘실경(實景)’보다는 ‘인물(人物)’에 대한 삶의 낱낱에 대한 기록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스스로 깨닫는 깨우침의 시간이 쌓여갔다. 그의 ‘여행 화첩(畫帖)’과 무수한 ‘기행(紀行) 노트’가 그것을 방증한다. <광주매일신문>이나 <사람과 산>에 고정적으로 원고를 넘기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순례자(巡禮者)’의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틈틈이 논문과 저서를 출간하느라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함과 동시에 국내․외 교류를 다지는 전시가 있다면 언제든지 참여하여 그의 스케줄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기 일쑤인 몇 해를 보냈다. 때로는 콜럼버스처럼 신대륙을 발견하는 ‘탐험가(探險家)의 마음’으로, 때로는 방랑(放浪) 시인 김삿갓처럼 소탈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예인(藝人)의 마음’으로 세계 오지 중에서도 ‘아시아의 험지(險地)’를 두루두루 답사하며 때로는 사진가처럼 풍경을 마주하여 ‘줌-인(Zoom-In)’ 된 인물의 표정을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등 오로지 두 발을 디딘 지구 땅 위에서 외로이 ‘사투(死鬪)’를 벌이는 심정으로 현대 수묵화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특히, 그가 여행 중 만난 삶의 다양한 모습들은 얼굴색, 표정 하나 닮지 않은 ‘세계 만민(萬民)에 대한 애정’으로 다작(多作)의 ‘인물 초상화(肖像畵)’를 남기게 하였다. 이것은 궁중 회화에서 ‘왕의 용안(龍顏)’을 세필(細筆)로 그려내는 ‘역사 기록화(記錄畵)’라기보다는, 빠른 필치(筆致)로 단숨에 그려내는 속도감 속에서 마치 달마의 흔적을 만나는 것과 같은 ‘전신사조(傳神寫照)’를 드러내는 데 가까운 ‘인물 초상 퍼레이드(parade)’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충분히 서민적이며, 시․공간을 뛰어넘는 흥취를 전달하는 ‘기운생동(氣韻生動)’이 가득하여 박화백의 작품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순간이동을 하여 네팔이나 인도, 미얀마와 파키스탄, 몽골이나 티베트, 히말라야 카일라스 등에 여행 중인 것 같은 설렘과 감동의 아우라를 선사한다. 이처럼 한 인간이 써 내려가는 진솔한 그림일기는 여행길에 쉬이 오르지 못하는 현실에 발목 잡힌 현대인들에게 정신적인 휴식을 안겨주며, 미래 어느 시점에 스스로 여행을 떠날 자유로움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문명의 수혜 속에서 잊고 지냈던 광활한 자연과 ‘영적 명상(靈的 瞑想)’의 세계에 다다르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박화백은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동경을 이해하면서도, 그의 깨달음과 자유, 평등, 평화의 노래를 다시 그만의 방식으로 재탄생하게 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읊는다. 그는 부활자이고, 순례자이며, 이 시대 최고의 노마드(Nomad ; 遊牧民) 시인(詩人)이자, 현대인들의 찌든 마음을 ‘정화(淨化)’ 해주는 ‘소울메이트(Soulmate)’, 가엾은 영혼(靈魂)들의 친구와 같은 부족장(附族長)으로 우리 곁에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 박은지 (갤러리 리채 학예연구실장)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