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상상력의 아이러니스트' 김은지 회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병헌 작성일18-09-21 17:18 조회6,568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김은지 <Oceanbeach>. 2008. 캔버스에 유화. 145x97cm ‘시적 상상력의 아이러니스트’ 김은지 회화 2018. 08.10 - 08. 27 / 갤러리 리채 (광주 봉선동) * 지난 8월에 있었던 김은지의 개인전에 관한 김병헌 (독립큐레이터)의 비평을 리뷰로 공유합니다. 김은지 작가의 작품들을 볼 때, 몇몇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사람들은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이어주고 정립시키는 시각적인 어떤 공통 요소들을 찾기가 어렵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각각의 개별적인 작품들은 주제, 기법, 재료 등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이 사실이다. 또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작품의 제목과 이미지가 매칭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의 작품들은 어떤 면에서 작품들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일단 그의 작업들은 모더니즘이나 구조주의적인 사고를 통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그의 작업들은 전체적인 일관성이나 명료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기법적인 면에 있어서도 통일성을 유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그의 작업들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작업들은 모더니즘 내지는 구조주의적 견해들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후기구조주의적인 사고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견해들을 모두 검토할 수도 없거니와,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의 것들을 참고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작가의 작업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의 도구를 제공한다고 감히 말하기도 어렵다 생각한다. 물론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신원 확인적 조건들을 정당화하는 모더니즘적인 사고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는 구조주의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각각의 사고가 상이하고 매우 난해하기 때문에 그리고 짧은 지면에서 그들을 하나하나의 견해를 연결시켜서 김은지의 작업들에 연결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필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그들 중 한 사람의 시각을 빌려 김은지 작가의 작업을 바라보고자 한다.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몇 해 전 타개한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의 소위 네오프래그머티즘(neopragmatism)적 입장을 참고하는 게 좋다고 본다. 미국 최고의 사상가 중 한명이자 네오프래그머티즘의 가장 중요한 권위자였던 로티는 그의 초기 주저인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1979)에서,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존재란 세계에 대한 정확한 표상(representation)을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플라톤(BC 428/7- BC424/3)이 말하는 것과 같은 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생각하는 영원한 절대불변의 진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에 따르면 이 세계에 대한 그 어떤 문장이나 판단도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 될 수 없다. 역사상의 과학적인 방법들이나 철학적인 방법들은 단지 일련의 우연한 “어휘(vocabulary)”들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것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것들 역시 당시의 사회적 관습이나 유용성에 따라서 선택하거나 버린 것에 불과한, 우연적인 어휘였음을 말한다. 김은지의 작업은 이미지에서건 제목에서건 간에 모든 것이 뚜렷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대상이나 사건, 나아가 세계에 대한 거울처럼 정확한 표상이란 파악할 수 없다는 로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의 작업은 모더니즘적인 하나의 체계적인 기준에 따라, 즉 위계질서적인 방식에 따라 행해지지도 않으며 항상 가변적이다. 다른 말로하자면, 그는 로티가 말하는, 확고부동한 신념과 같은, ‘최종 어휘(final vocabulary)’에 대하여 근본적이고 계속적인 신뢰를 갖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의 완성, 확실한 정답, 그림의 목표, 영원한 자유, 고정불변의 유토피아, 명확한 형태에 대한 것을 예술에 있어서 하나의 언어라고 한다면, 이것은 어휘라는 말로 대체가 가능하다. 이제 김은지의 작업방식을 로티의 어휘에 대입시켜보자. 김은지의 작업들에서 나타나는 바대로, 그는 앞서 열거한 것과 같은 일종의 ‘최종 어휘’에 대하여 수상하게 여기며 이러한 것들이 단지 우연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누구든지 개인적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것임을) 완전하게 인식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마치 우연적인 어휘를 구사하듯이, 모든 것은 그저 우연적인 시각언어로서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랑, 우애, 꿈과 같은 하나의 ‘사회적 희망(social hope)’을 소망하는 시인이자 몽상가로서 자유주의의 유토피아를 그리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로티가 말하는 것처럼, 한 명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liberal ironist)로서 자신의 시각언어를 우연한 산물로 보는 것에 만족하는, 나아가 그러한 어휘들을 조금씩 수정하고 창안하는 한명의 재서술(re-description)의 기획자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로티가 말하는 재서술이란 실재나 진리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서술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예로 들면서 그것을 정치라기보다는 오히려 재서술하는 언어 게임으로, 미국에 대한 새로운 서술로 본다. 그리고 이것은 링컨이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시인이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의 연설은 시적인 표현으로서 미국에 대해 재서술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그와 같은 시적인 상상력이 우리 사회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김은지 작가의 <하늘바라기> 시리즈나 그와 비슷한 또 다른 <Untitled> 시리즈를 보면, 수평선과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 우리의 앞날을 밝혀줄 태양이 떠오르는 장면이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꿈, 사랑, 행복과 같은 희망을 상징하는 태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선을 통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지점에서 태양이 곧 떠오를 예정임을 관객들을 알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시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백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기보다 비움으로써 새로운 것을’ 채움으로 인해서일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그의 예술적 언어는 절대적인 자유나 영원불변의 석화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언제나 모습을 바꿀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가변적인 ‘자유를 향한 동경’과 ‘찰나의 미’에 ‘머무는 유토피아’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김병헌 (미학, 미술비평, 독립큐레이터) 김은지 <Alice in wonderland>. 2016. 패널에 혼합재. 25.5x34.5cm / <생각해>. 2017. 패널에 혼합재. 42x33cm 김은지 <Dream>. 2016. 캔버스에 혼합재. 73x91cm / <표현된 공간 I>. 2016. 공간에 아크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