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영에서 체감으로의 확장-전현숙의 회화작업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5-12-29 10:08 조회5,413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투영에서 체감으로의 확장 전현숙의 회화 작업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술작품을 마주할 때 가장 먼저 작업의 의도, 혹은 의미를 고려한다. 다시 말해 작가로 하여금 창작의 동기와 더불어 내용에 따른 형식의 개연성 등을 재고하는데, 이러한 사고의 흐름이 작품해석에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라 여긴다. 예술을 비롯한 모든 사회 현상에서 ‘왜?’라는 물음이 단순한 물음이 아닌 현상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문제제기의 결과인 것처럼, 예술을 행하는 주체 또한 ‘나는 왜 창작하는가?’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끊임없이 지속한다. 표피적으로 바라볼 때, 예술의 수동적 객체로 여겨지는 향수자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얻는가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보면, 결국 창작자는 예술로써 삶을 드러내고 이를 받아들이는 주체는 예술로서 삶을 교감하며, 서로 간에 일종의 정서적인 합일점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전현숙의 회화작업은 그러한 합일점의 선상에 있다. 힘 있고 굵은 선맛으로 인간의 벗은 몸을 다루었던 작가의 초기 작업이 관념적 성향의 누드화가 아닌, 삶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였듯이, 전현숙의 관심은 여전히 사람이고 삶이다. 누드(nude)이기 전에 자유로운 나체(naked)이기에 표현이 가능했던 인간 본연의 감정들. 또한 작가가 그려냈던 것은 오롯이 신체였기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일련의 생리적 감정이입을 끌어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전현숙의 초기 작업 시기는 그리는 행위 자체로써, 그리고 타인의 맨몸을 생생하게 드러냄으로써 외려 그 자신이 살아있음을 만끽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일종의 관계성은 이후 작업에서 나의 신체 혹은 나의 이야기로 풀어지며, 서사적 요소가 배가되는 방향으로 흐른다. 작가의 10여 년 전 구작들, 예를 들어 <그리운 영혼> 시리즈나 <내 안에 있는 당신을 위하여>, <그 쓸쓸함에 대하여>등의 작품에서 체득되는 감성이란 사랑과 회한, 그리움, 허무 따위이다. 화폭에서 직접적인 상황 묘사나 내러티브를 발견할 수 없지만, 그 감성의 표출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지할 수 있다. 선과 선이 마주치는 모호한 공간, 시간의 층위가 감지되는 무채색, 감정의 환기를 상징하는 원색의 색면과 패턴은 작가의 탄탄한 데생력과 어우러지며 보는 이에게 긴장감을 선사한다. 다소 어둡고 무거운 느낌의 이 시기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작가의 화법이다. 힘겹게 부둥켜안거나 부유하는 남녀, 간절히 무언가를 간구하는 한 사람, 고개를 떨군 채 침잠하는 또 다른 한 사람. 마치 각자의 현존(現存)을 처절히 분출하는 듯한 인물의 제스처는, 작가가 작품의 감상자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대화법이었을 테다. ‘그 여자’를 둘러싼 모든 것들 자전적 이야기로의 물꼬를 튼 작가는 세상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을 넘기며 기존의 ‘화법’이 아닌 의미 그대로 ‘화술’로의 전환을 시도한다. 달리 보면, 구상회화에 능숙한 작가들이 지키고자 하는 모종의 엄숙주의를 버렸다. 짐스러운 삶의 무게를 느끼고, 살아감의 저 바닥끝까지 내려갔기에 도리어 다시 차오를 수 있었던 그녀만의 정서적 변화가 작품에 반영되는데, 해학적인 인물표현과 더불어 일상 안의 친근한 오브제들이 화면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어린아이의 비율과 같이 가분수 형태를 띤 인물들은 데포름된 형상 자체로써 유머와 위트를 자아내고, 색채도 원색과 파스텔톤으로 화사해진다. 생활을 찬미했던 전통 민화의 미감이 엿보일 정도로, 전현숙은 작품세계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글쓴이가 당시 변화한 작업들을 보면서 느꼈던 안도감을 상기해보면, 삶과 밀착되어가는 화풍이 꽤나 반갑기도 했었고, 유연해져 가는 작가의 모습에 많은 기대를 하기도 했다. “나의 작업들은 내 삶에서 태어난다”고 서술했던 그녀는 <그 여자>라는 주제로 자신의 생을 당당히 부각시킨다. 무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자화상, 현재의 삶을 함께 버텨내고 있는 중년의 남자, 일상에서처럼 쾌활한 표정으로 그녀 곁에 존재하는 반려견 등, 딱히 설명이 필요 없는 작가 주변의 인물과 대상들이 화면 가득 자리한다. 인물을 꾸미는 것은 붓과 종이, 손거울, 안경, 라디오, 술병과 같은 실제 그녀의 삶에서 귀하게 쓰이고 있는 물건들일 뿐이다. 굳이 상징적 코드를 찾는다면 외줄과 모란꽃, 조각배일 터이다. 모란이 상징하는 인생의 부귀영화처럼 중년에 접어든 작가는 생의 충만함을 간절히 원한다. 모란의 풍성함과 대비되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는 스스로가 감내해야만 하는 삶의 고단함이기도, 여적 불안전하기 짝이 없는 과정형의 현재이기도 하다. 화폭에 낭만적인 서정을 가미시키는 조각배 또한 뜻 그대로 살아감의 여정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여행처럼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 배에 가득 실은 애장품처럼 다양한 일상의 편린들이 애착과 고통, 행복, 슬픔 속에 버무려지며 그렇게 유유히 그녀의 삶을 유영한다. 커다란 눈망울로 입을 꼭 다문 채 자신의 인생을 담담히 내비치는 ‘그 여자’는 오히려 감상자로 하여금 실제적인 교감을 이끌어낸다. 전현숙은 다소 수줍고 내밀한 독백이지만, 세상과 소통 가능한 화술로써 회화의 밀도감을 축적해나간다. 덧붙이자면, 자신을 초극하고 종국에는 치유할 수 있는 대안도 작업에 있기에, 이전보다 힘을 빼고 담백해져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나’로 돌아가 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현재를 들여다본 작가는 이후의 작업에서 보다 근원적인 자아를 성찰하려 한다. <꽃들아! 춤을 추어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작품들에서는 주요 인물들이 기존과 다르게 단독으로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중년 여성이 아닌 어린 소녀의 이미지를 내세운 부분인데, 전현숙은 성인이 되기 전의 소녀가 나타내는 순수함과 불완전성, 즉 중의적 의미를 띠는 대상으로서의 소녀를 작품 안에서 풀어낸다. 주로 삐에로 복장을 한 소녀는 각시탈과 양반탈을 안고 있거나 쥐고 있다. 본연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탈은 사회적 제도와 관습에 의해 순수성을 잃어가는 성인의 모습이자 억압된 자아이며, 이는 곧 작가 자신을 반추하는 매개물이기도 하다. 소녀가 자기반성의 대상이라면 각시탈은 자기 투영의 대상일 것이다. 그저 살아가는 것에 급급하다보면 나를 잃어가기 마련이고, 이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산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광대놀음과도 같은 생이지만 희망이라는 것을 버릴 수는 없기에, 작가는 소녀의 옷에 부귀와 복을 상징하는 모란꽃과 박쥐문양을 빼곡히 새겨 넣는다. 가까스로 타고 있던 외줄도 직접 잡으며, 그 줄로 각시탈을 조정하기도 한다. 그 즈음 작가의 개인적인 삶이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는 시기였기에, 이와 같이 주체적 자아를 찾는 행위는 자연스레 작품 안에 스며들게 되었다.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고자 하는 의지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의지일 것이다. 주사위, 피노키오, 날개, 종이학 등 이전 작업보다 심화된 은유적 장치들을 염두에 둘 때, 작가가 갖는 이상적 삶에 대한 의지, 그리고 표상들은 더욱 극명하게 현실과 맞물린다. 많은 이들이 예술가들에게 갖는 통념 섞인 반응 중에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 “멋있다”, 혹은“낭만적이다”라는 감탄 아닌 감탄의 어조이다. 삶이 힘들어 보여 안타까운데, 그 안에서 생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찾는 예술가들을 보면, 딴 세상 사람처럼 짐짓 의아스럽다가도 대단하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전현숙의 회화는 그것이 진정 멋지고 낭만적이기에 힘을 갖는 것이 아닐까? 예술 안에서 삶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통해 삶을 느끼는 나와 너의 합일점. 시작은 나의 투영이었지만, 결국에는 다른 이에게 각자의 나를 체감하게 하는 예술, 그녀 작업의 힘이자 새로운 가능성일 테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녀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진중한 대화법으로, 그리고 화술로써 세상과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 롯데갤러리 큐레이터 고 영 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