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죽의 숲을 거닐다 - 정광희展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4-10-15 08:51 조회9,305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비움과 채움을 먹의 파동으로 연출한 정광희의 ‘무제’ 설치 묵죽의 숲을 거닐다 정광희 ‘먹을 쌓다’ 개인전대숲에 스민 음과 양의 공명관념 본질의 채우고 비우기 묵죽은 옛 선비들이 오랫동안 즐겨 다루어 오던 사군자 화제다. 가끔은 번잡한 세상사 잠시 물려두고 작대기 산수처럼 한 획에 정신을 모아 마음을 닦아내던 심중서화라 볼 수 있다. 마음을 비우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평정심과 지혜를 찾아가는 수양의 방편이었다. 재료나 형식이 워낙 다채로워지는 요즘의 미술현장에서 먹을 중심에 놓고 마음과 세상을 담아내는 정광희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먹을 쌓다’라는 이름으로 10월 4일부터 11월 9일까지 상록전시관에 마련된 이 전시는 기존 서화형식에서 벗어나 한지요철 화판을 만들고 먹을 올리거나, 철판을 오리기도 하고, 하얗게 빈 공간에 검은 묵죽들을 무리지어 설치한 작품들이다. 먹을 통해 정신의 뿌리를 찾아온 지난 10여년 작업들과 더불어 최근 새롭게 시도하는 설치까지 여러 연작 가운데 일부를 골라 놓았다. 이번 전시는 큰 전시실 하나를 대숲공간으로 연출한 ‘무제’가 중심을 이룬다. 넓은 전시실에 먹색으로 감싸인 대나무 300여개가 군집을 이루어 매달려 있고, 넓게 비어 둔 여백의 공간으로 그 묵죽의 울림이 잔잔히 퍼지도록 설치한 작품이다. 묵은 고서와 순지에 자유롭게 풀어 쓴 글씨 아니면 상형문자 같은 모필의 흔적들을 올려 대나무통을 감싸고, 그 대나무마다 여러 번 겹쳐 올린 먹의 농담으로 깊고 묵직한 묵향이 배어나오게 했다. 중심부의 짙은 먹으로부터 가장자리 엷은 먹빛과 텅 빈 공간까지 수묵의 기운이 번져나가고 또한 스며드는 형세다. 조각조각 붙여진 고서의 조각들과, 읽히든 안읽히든 대통에 남겨진 필치의 흔적들은 세상에 떠도는 숱한 언사와 지식의 그림자들일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산되고 소멸하는 무수한 말과 지식들은 강건하지만 비어있는 대통들 사이로 공명을 이루며 맴돌거나 블랙홀에 빨려들듯 스며들기도 한다. “나의 작업은 비움과 채움으로 이루어진다. 비움과 채움이 경우에 따라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면서… 비운 것도 아니고 채운 것도 아닌 경우도 있다. 정중동과 같은 의미다. 여기서 비움과 채움을 통해 생명의 순환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지난 7월 광주 롯데갤러리에서 먼저 맛보기로 선보였던 ‘선비의 정원’과 같은 맥락이다. 고서와 서예의 편린들로 감싸고 더러는 먹을 짙게 올린 대나무들 150여개를 허공에 매달아 그 듬성듬성한 대 숲 사이로 거닐며 선비의 정원을 음미하는 공간이었다. 같은 연장선에서 이번 상록전시관 설치는 훨씬 확대되고 조밀해지면서 중심과 주변부를 잇는 먹의 파동이 더 장중해져 있다. 그는 "짙은 땅의 기운을 바탕으로 쭉 뻗은 대숲은 올곧게 위를 향하며 그 생명력을 하늘과 바람에, 즉 다시 '자연'으로 산화시킨다"고 말한다. 묵죽에 대한 그의 독자적인 시도는 이번 전시의 다른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제목은 역시 ‘무제’다. 화선지의 무한바탕이 3차원 실재공간으로 열려진 듯, 하얀 전시실을 화지삼아 마치 허공에 먹선을 긋듯 검은 먹을 올린 대나무가 벽과 천장을 가로지르며 추상적인 선을 이룬다. 관객은 3차원적인 이 서화공간에서 한 가닥 먹선 사이로 거닐며 추상화된 묵죽도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정광희가 작업의 키워드로 삼고 있는 ‘전통서예와 현대회화가 결합되면서 우리 것으로 승화되는 추상성’, ‘음과 양과 여백이 일체가 되는 비움과 채움의 생명순환’, ‘거대한 에너지의 자연을 최소화하는 단순성’ 등을 먹선의 입체적인 설치를 통해 함축시켜낸 것이다. 정광희의 작업에는 뿌리에 대한 탐구의식이 강하게 배어있다. 정신의 뿌리, 문화의 뿌리, 자기 작업의 뿌리를 찾고, 이를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예술형식으로 드러내는데 힘을 쏟는다. 이를 위해 굴레가 될 수 있는 전통서법이나 회화에 대한 관념과 세상의 지식 따위를 걷어내려 한다. 이전부터 계속 해오던 ‘인식으로부터의 자유’ ‘아는 것 잊어버리기’ ‘생각이 대상을 벗어나다’ 연작을 비롯, 최근에 아예 어떤 선입견도 배제하려는 듯 ‘무제’로 이름하는 실험적인 먹작업들까지 일련의 ‘비우기’이자 진정으로 채워야 할 것들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적묵과 파필의 흔적처럼 철판을 오려낸 ‘무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틀에 박힌 한지 바탕으로부터 탈출이면서 “본질로 다가가는 또 다른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한 작업과정을 거치는 쪽그림, 대나무설치, 철판서화 모두가 본질을 찾아가는 파격의 행보인 셈이다. 먹으로 함축하고 풀어내는 서화의 본래 정신성과 더불어 “온갖 만물의 형상과 존재양식을 넘어설 수 있는 그 관념의 자유를 찾아” 재료도ㆍ형식도ㆍ공간도 계속 새롭게 모색해가는 과정이다.- 조인호의 미술이야기 (전남일보. 2014. 10.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