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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 환희을 담은 꽃그림- 강동권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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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5-11-14 14:34 조회6,6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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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기쁨과 행복, 환희의 순간을 화사한 꽃그림으로 담아내는 화가 강동권의 여섯 번째 개인전이 116일부터 28일까지 광주 무각사 로터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 붙여진 김병헌 의재미술관 학예실장의 평문을 소개한다.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행복)를 실천하는 화가 강동권

    김 병 헌 (의재미술관 학예실장)

     

    강동권 작가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그림에 대해 누구에게나 친숙함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라고, 그리고 가슴 속에 무엇인지 모르지만 알 수 없는 어떤 따뜻함을 피어오르게 만드는 그런 그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그림 속에 들어있는 그 형상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그려진, 즉 사실적으로 그려진 것이며 더구나 그것들이 다름 아닌 아름다운 꽃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름답게 활짝 핀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동안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대명사로 여겨졌던 것이고 많은 화가들의 화폭에 그것을 그려 넣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와 같은 점에도 불구하고 꽃을 주제로 선택하여 그리는 화가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오늘날 그러한 화가들은, 눈에 쉽게 보이는 뻔한 방식으로 뻔한 그림을 그린다는 등의 이유로,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그림을 위해 그다지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지기 일쑤이다. 하지만 과연 단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을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사실적인 방식으로, 소위 말해서 예쁜 그림을 그린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치부되어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갖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쉽게 보이는 길이 또한 동시에 가장 어려운 길일 수도 있음을 언제부터 잊어버리고 살게 되었는지를 또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강동권의 그림은 앞서 언급했듯이 아름답고 예쁜 꽃이 들어있는 그림, 즉 꽃 그림이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판단력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인간의 감성적 인식들 중 가장 분명한 인식을 미(beauty)로 보면서, ‘저 꽃은 아름답다처럼, 우리의 일반적인 미에 대한 판단의 예로 꽃을 들고 논의하고 있듯이, 우리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말할 때 가장 많은 예로 드는 것이 바로 꽃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동권의 그림은 자연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꽃을 대상으로 삼는 그림이자 그것을 실제로 있을법하게 보이도록 그리는 사실적인 그림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사실적인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즉 작가의 창조적인 구성 등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보여지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엄밀히 말해서, 실제와 똑같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작가적 개입을 통하여, 물론 최소한의 개입이지만, 보다 완벽한 구도와 조화를 통해서 더욱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실제처럼 꽃들을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그렸을까?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대상을 그저 옮기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어떤 무언가를 위해서인가?

    예술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이론이자 가장 대표적인 이론을 말한다면 예술이란 자연의 모방이라는 플라톤(Plato, BC 427/8-BC 347/8)이 체계화시킨 예술 모방론일 것이다. 여기서 자연이 가리키는 것은 사람, 사물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 현상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자연으로 플라톤은 이와 같은 모든 현상들의 배후에 그것들의 본질, 즉 이데아가 있음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현상계를 모방하는 예술에 대하여 본질이 아닌 허상을 모방하는 것이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와는 달리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 BC 322)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들의 배후가 아닌 안에 그것들의 본질인 에이도스(eidos)가 들어있다고 생각했으며, 이 본질을 모방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예술을 지지하였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들 내부에 숨어있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사물을 그 사물로 만드는 본질이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 안에 있으며 그 본질을 모방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예술이란 단지 현상세계의 겉모습만을 모방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 지식획득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 에이도스를 예술이 모방함으로 인하여 결국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거친 자연을 완성시키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예술 활동을 가장 가치 있는 인간 활동들 중 하나로 보았다. 이와 같은 예술을 통하여 자연은 우연성과 허위로부터 해방되어 참다운 본래의 자태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이 자연의 단순한 모방을 넘어 그것을 이상화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견해를 일반적으로 이상적 자연주의(ideal naturalism)’라고 부른다. 다른 한편, 이와는 별도로 외부에 있는 대상을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그 어떤 가감도 없이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을 우리는 예술에 있어서 사실주의(realism)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실주의 회화란 더럽거나 불결한 것, 추한 것 등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충실히 그리고자 하는 회화를 말하며, 좁게는 19세기에 나타난 사회의 어두운 면 등을 솔직히 드러내 보이는 19세기의 회화를 가리키기도 한다.



    강동권의 그림은 얼핏 볼 경우 사실주의 회화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의 그림은, 꽃의 아름다움이라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의 매우 밝게 빛나는 면을 그렸다는 데에 있어서 좁은 의미의 사실주의 회화에 들어맞지 않으며, 작업에 있어서도, 물론 작가의 주관적인 개입을 최소화시키기는 하지만, 화면의 구성, 배치, 강약의 조절 등을 통하여 실제 대상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넓은 의미의 사실주의 회화에도 끼워 넣기가 어렵다고 본다. 오히려 그의 그림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상적 자연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그림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왜 이것을 그렸는가가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강동권 작가의 그림에서 실제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강동권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가 꽃그림을 그린 이유는 그림을 그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림을 보는 관객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지지지 않고 언제나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또 꿈꿀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루는 방법조차 찾지 못한 채 세파에 찌들어 그저 그렇게 살아가기도 한다. 강동권 작가는 시대를 통틀어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아온 아름다운 꽃들을 그리는데서 행복한 자신을 발견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린 꽃들을 보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데서도 행복을 맞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행복은 이상적 자연주의와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행복이란 말에 해당하는 용어를 든다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용어는 좋은(good)’이란 의미의 에우(eu)’정신(spirit)’이란 의미의 다이몬‘(daimon)’이 합쳐진 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에서 아레테’(arete)’라는 용어와 더불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행복, 에우다이모니아란 간단히 말해서 이성(logos, reason)과의 일치 속에서 아레테를 보여주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행복한 삶이란 이성과 일치하는 아레테가 있는 활동의 삶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여기서 아레테란 고대 그리스에서 본래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어떤 종류에 있어서의 탁월함이나 우수함(excellence)을 의미하는 말이자 동시에 도덕적인 덕(moral virtue)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목적이나 기능을 실행하는 것과 연결되어 사람의 완전한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행위와 관계되기도 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훌륭한 과학자가 되려면 탁월한 수학적인 기술이 필요하며 따라서 수학을 잘한다는 것은 최고의 과학자가 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에우다이모니아를 달성하는 것은 이성에 의해서 아레테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행복이란 잘 사는 것(being well)이자 잘 행하는 것(doing well)이며 아레테에 따라 영혼(psyche)의 합리적인 부분을 훈련시키는 활동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동권 작가는 가장 아름다운 대상 중 하나이자 주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인 꽃을, 그것도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만개한 꽃을 그린다. 또한 그것을 그림에 있어서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것은 꽃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하여 마치 명상하듯이 관조(contemplation)의 태도로 본다는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작가 개인의 감정, 정서 등 감성적인 것들을 철저하게 이성의 통제 하에 둠으로써 자신을 자연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결코 쉽지 않는 것임을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완숙한 기술적인 연마가 없이는, 즉 회화에서의 아레테가 없이는 관조의 상태에서 자연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그림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통하여 그의 작업은 자연이 내부에 품고 있는 미적이 질서와 조화의 상태에 도달하는 과정이 되며 결국 작가의 영혼을 아레테에 일치시키는 하나의 에우다이모니아를 성취하는, 그래서 화가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 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강동권의 그림은 플라톤이 생각한 것처럼 선(goodness)이자 미(beauty), 선한 것은 아름답다라는 칼로카가티아(kalokagatia)’를 그리는 것이자 자신의 에우다이모니아를 실천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렇기에 남들이 그리기 꺼려하는, 그래서 오히려 흔치 않은, 꽃그림을 솔직한 태도로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그려나가는 강동권 작가의 행복한 삶이 모두에게 전달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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