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우 개인전 ; ‘染, 무등에 물들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범현이 작성일24-09-24 10:54 조회721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최진우 <무등의 기운-氣>, 2022, 한지에 먹, 채색, 55x32cm 최진우 개인전 ; ‘染, 무등에 물들다’ 2024.09.03-09.30 / 오월미술관 모자라고도 넘치는 고요 작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다. 그러나 교사이기 이전에 화가다. 그렇게 태어났다. 유전자가 이미 다르게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그래서 그 길을 간다.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무엇. 감각과 사유의 변형은 말할 것도 없이 직접적 해명이나 설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언어의 표현과 묘사를 통해 언술하고 기록한다. 시간이 있을 때, 가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 산에 오른다. 굳이 무등산이라고 정확히 쓰지 않아도 모든 산이 이미 무등산이 된 것 역시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삶의 전체가 예술언어가 된 지금은 오르는 모든 산이 무등산이다. 부제 : 자기형성적 실천 시야각(視野角)이란 시야의 범위와 그 각도를 말한다. 사람의 눈이 갖는 기본적인 시야각은 수평일 때 180°, 수직일 때 120°라고 하지만 작가의 시야각은 카멜레온처럼 광각(廣角)이며 프리즘 같은 기능을 수반한다. 광각으로 산을 보고 프리즘으로 걸러낸다. 여기에 철학적 탐구가 이성적 차원에서 사고 실험을 도모한다. 무등산은 이쯤에서 작가와 조우한다. 산이 그곳에 있어서 오르지만 단지 산이 아닌 이유일 것이다. 물빛이 좋아 수채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으나 대학에서 한국화로 선회했다. 우리 산, 우리 땅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당연한 일이다. 한편으론 수채와 한국화가 갖는 물이 주는 농담(濃淡)이 작가를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일상의 가르침에서 큰 교훈을 얻는다. 생활 속의 반복에서 일평생 실천해야 하는 힘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단정히 옷을 갈아입고 학교로 출근하는 것처럼 경건하게 스스로를 매조지 한다. 작업 역시 그렇다. 그러한 자기 성찰 속에서 대학시절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에서 사회적 부조리와 맞섰다. 성찰의 깊이가 생활과 어울리고 배우는 지식이 몸에 붙어 있다면 그 공부는 부질없지 않을 것이며 발전하는 가운데 지식과 학문의 깊이는 예술언어란 생생하고 정확한 현실의 언어인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지식과 생각의 깊이가 일상적 원칙으로 작용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뛰어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천천히 멀리 갈 생각이다.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다만 시야각을 좀 더 광각과 광폭으로 유지할 것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평정심이다. 늘 똑같이, 항상, 지금처럼 해나갈 일이다. 부제 : 산(山)_ 무등(無等)이 내게로 왔다. 이번 전시의 주조는 무등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직접적 발산보다는 에둘러 말한다. 예술적 언술은 직접성보다 넌즈시, 표현한다. 작가의 언술은 반쯤 드러내고 반쯤 숨기는 언어인 것이다. 무등을 그리고 무등을 오르면서 무등이 성찰하게 하는 의미를 다면(多面)으로 침묵한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작품의 숨은 뜻을 더 적극적으로 읽어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미적 경험일 것이다. 드러냄과 숨김이 이번 전시의 도드라진 작가의 발현이다. 「천불천탑」(1995)은 천 개의 탑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의 얼굴과 몸으로 세워졌다. 운주사의 미완의 혁명과 황석영 소설인 장길산에서 인물을 가져왔다. 무등이 품에 안은 사람들이며 무등을 꿈꿨던 이상이 그곳에 존재한다. 무등산 정상에는 뱃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 최미애의 품속에 안겨 있는 형상을 그려 넣었다. 태어나지 못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생(生)을 도륙당한 아이가 그림 속에서 작가의 손을 빌려 무등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다짐」(1998)은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무등의 완만한 선(線)이 주는 안정감보다 박승희5주기 라는 내용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바로 옆 벽보에는 오월항쟁 계승 후 총궐기대회를 읽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에 눈이 시렸다. 이제는 너무 멀리 와 버린 우리의 감성이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감성에 뿌리박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감각은 주어진 것을 이것이 나타나는 형식으로 단지 수용하지만은 않으며, 주어진 것의 변형을 다른 정신 능력에 위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감각은 스스로 자기들의 실천 속에서 새로운, 더욱 충족을 요구하는 기능성과 능력, 사물의 형식과 성질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실현을 촉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그때의 우리와 너무나 많이 멀어졌고 그만큼 변형되었다. 부제 : 우리 산 우리 그림 조선의 그림이다. 우리 그림이란 의미다.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 쉼 없이 걷는 땅이다. 그 땅이 작업의 기본이다.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 세상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 무릇 우리의 그림이란 마땅히 이 땅의 흙과 산과 사람과 풍경이 있어야 했다. 겸재의 진경산수(眞景山水)와 단원의 실경산수(實景山水)속에서 자신이 나아갈 화업(畫業)을 찾고자 했다. 매일 점을 찍으며, 파동을 느끼며 구도의 길을 간다. 물의 투명함으로 농담(濃淡)을 겪으며, 뱉어내며 조선의 산천을 그린다. 무등을 넘어 인간의 삶 속에서 구현해야 할 소망인 무유등등(無有等等)을 담는다. 우리는 대상 속에서 대상이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원래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은 결국 사물의 전체성을 전혀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 경험 속에서 사물의 본성과 세계의 원리에 다가선다. 그러면 주체는 자기를 완전하게 떠나지는 않는다. 즉, 자기 속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의 느낌은 또 다른 느낌을 넘어서고 하나의 생각 안에서 다른 생각을 갖는다. 결국, 세상은 돌아보는 만큼 더 커지고 마침내 내 일부가 된다. 내가 보는 세상의 진실은 내 진실을 담은 채 지평을 넓혀가며 심미적 만남에 윤리적 차원과 함께 예술경험까지 가능하게 한다. 이 넘어섬, 이겨냄이야말로 예술적 언어인 그림이며 아직 열리지 않은 삶의 지평마저 문을 열게 할 것이다. 무등은 언제나 가까이 있었다. 이 풍경화들에 어떤 심상과 느낌이 묻어났고, 그것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세밀한 묘사와 풍요로움보다 작가의 단정과 절제의 표현이라고 여겨진다. 외롭고 쓸쓸했을 작가의 마음과 도구로서의 손이 느껴진다. 풀 한 포기, 무등의 선 한 줄기, 나무 한 그루에서 묵묵히 걷고 있는 고독과 성찰이 묻어남은 이 때문일 것이다.(후략) - 범현이 (오월미술관 관장·소설가) 최진우 <무등에 물들다(부분)>, 2024, 한지에 먹, 270x182cm 최진우 <달을 낳다-월출전도 I>, 2021, 한지에 먹, 채색, 54x34cm 최진우 <대숲을 물들인 달빛>, 2021, 한지에 먹, 91x41cm 최진우 <소소한 풍경 II>, 2023, 한지에 먹, 95x55cm 최진우 <낯선 만남+木>, 2023, 한지에 먹, 90x40cm 최진우 <낯선 만남+조합 III>, 2022, 한지에 먹, 41x53cm 최진우 <통일할머니>, 2022, 한지에 먹, 채색, 35x53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