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 화백 초대전 ‘백화난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조인호 작성일24-10-27 13:33 조회425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김영태 <코르도바>, 2024, 캔버스에 유채, 117x91cm, 함평군립미술관 소장 김영태 화백 초대전 ‘백화난만’ 2024.10.15.-12.15 / 함평군립미술관 김영태 화백은 남도 구상화단을 일궈온 주역이다. 특히 오랜 기간 ‘광주일요화가회’ 지도교수 활동을 통해 아마추어와 전문 예술영역 간의 간격을 좁히고 서양화의 대중화에 일조를 한 분이다. 1927년 함평 출생이니 올해 98세로 곧 백수를 앞두고 있다. 조선대학교 미술과 1회 졸업생이기도 한 그의 생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과 한국전쟁기, 경제개발과 문예진흥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회화세계를 펼쳐왔다. 권위주의 시대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나 [전라남도미술전람회](道展) 같은 경쟁 관계 공모전에는 참여하지 않고 평생을 독자적인 활동으로 화단 이력을 일궈온 비제도권 야인이기도 하다. 호남화단의 큰 봉우리로 일컬어지는 오지호 임직순 화백의 회화론과 화풍이 융합된 부드럽고 밝으면서도 중후한 색채감의 회화작품들에는 사리 분별이 명확하면서도 많은 이들과 폭넓게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져 온 작가의 인품이 온전히 담겨져 있다. (중략) 김영태 화백의 회화 주류는 자연주의 구상회화다. 고향인 함평의 시골 전원과 남도의 자연이 워낙 어린 시절부터 감성 밑바탕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성적으로 변화무쌍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자연에 동화되어 있었다. 전체 작품들에서 굵고 거친 붓질과 서로 대비되는 색채들을 즐겨 다룬 공통된 특징을 보이면서 자연 그대로의 풍경도 많지만 도회지를 낀 산을 주제로 삼거나 마을이 어우러진 포구 풍경들이 많은 것은 순수자연과 인간 세상이 조화된 생동감 넘치는 화폭을 추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영태 화백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펼친 것은 첫 개인전을 가진 1972년 무렵부터라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1968년까지 교직에 있다 보니 적극적인 작품활동에 한계가 있었고, 40대 들어 늦게 가진 첫 개인전 후로 거의 매년 개인전을 갖거나 초대전들에 활발히 참여하는 확연한 변화가 나타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창 의욕적으로 활동을 펴나가던 1976년 갑작스러운 충장로 화실 화재로 내부가 전소되어 젊은 시절 20여 년간의 작품과 자료들을 다 잃어버려 작가의 화업 인생을 시기별로 찬찬히 조망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현재 남아있는 중년기 작품들 가운데 <산촌에서>(1979)를 보면 함께 광주일요화가회를 이끌었던 조선대 임직순 교수의 영향이 짙게 묻어난다. 주황색 벌건 황토색 밭과 연두빛 작물들, 녹청의 산과 붉게 물들어 오는 석양이 화폭에 뚜렷한 대비효과를 보인다. 같은 해 작품인 <목포에서>(1979) 또한 선창가 가옥들 묘사에서 신선도를 높이는 흰색과 푸른 바다, 그 뒤 원산의 보라색이 단지 바라다보이는 풍경 그대로를 묘사하기보다 화폭 공간에서 색채 간의 조응 효과를 주관적으로 조율해서 운용하고 있다. 오지호 화백이 민족 정서가 배인 자연의 빛(태양광)과 색, 그 생명작용을 담아내는 활기와 감흥을 강조하던 것에 비해 자연을 대하되 이를 주관적으로 재해석한 화면 위 회화적 요소로서 색채효과를 우선하던 임직순 교수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작가 자신도 임직순 교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다. 이렇듯 김영태 화백의 회화에는 호남 자연주의 구상회화를 일궜던 오지호 화백과 임직순 교수의 생명 원형으로서 자연과 이를 대하는 화가의 주관적인 감흥, 이를 드러내는 빛과 색채에 대한 강조점들이 조화롭게 융합되어 있다. 이는 주된 소재나 회화적 표현형식에서 평생 큰 변화가 없는 편인 김영태 화백의 80여 년 회화세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경향이다. 그 예로 1980년대 작품들 가운데 <어촌이 보이는 풍경>(1985)이나 <무등산>(1988), <월출산의 심추>(1989) 등을 들 수 있다. 오지호 화백 특유의 화면 위에서 리듬감 있게 움직이는 붓터치보다는 대체로 잔 붓질들로 눌러 칠하고, 임직순 교수처럼 원색들 사이로 중간 색조가 많이 배치되고 있다. 이는 본래 무엇이든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작가의 성향과 탄탄하게 화면을 쌓아 올리는 중년기까지의 화풍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성향은 1990년대 이후 들어 훨씬 대범한 필치와 밝고 명확한 색채대비들로 주관화된 화면에 생기를 돋우게 된다. 아무래도 90년대 들어 훨씬 늘어난 타지와 해외 전시회 참여와, 계속된 아시아, 유럽, 미주 등 세계 각지 여행에서 시야를 넓히고 화업을 객관화해보며 자신감과 독자성을 더 높여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을 것이다. 1992년 작인 <무등산>은 3단 구성한 화면에 중경의 갈색, 원경 무등산의 주황색과 산봉우리 서설 등을 넓은 색면처럼 배치한 점이 눈에 띈다. 이와 달리 산세부터가 전혀 다른 같은 해의 <월출산>은 기암괴석 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을 잘게 쪼갠 붓터치들을 역시 삼단의 큰 색면 안에 채워 넣었다. 무등산과 월출산의 여러 연작들에서도 색면분할 하듯 넓은 색채공간과 그 안을 채우는 붓질의 차이는 대상의 특성에 따른 표현법으로 마찬가지다. 2005년 <대산의 4월>과 2016년 작 <새벽의 안나푸르나> 등 이러한 색채와 필법의 화폭 운용은 만년에 이를수록 더욱 대범해지기도 한다. 김영태 화백은 어느 아카이브 인터뷰에서 “인상주의적 사실주의 스타일을 추구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남도미술의 주류는 꽤 긴 시간 동안 ‘인상주의적 회화’가 큰 맥을 이루어 왔다. 요즘이야 워낙 다양해진 청년세대의 독자적인 탐구들로 그 견고한 틀이 깨지긴 했지만, 지역에 기반을 둔 많은 화가들이 자연과의 교감 감흥을 즉흥적 필치와 원색 위주로 묘사하면서 형성된 지역미술의 특징이었다. 물론 ‘인상주의적’이라고는 하지만 거기에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 표현주의 등이 뒤섞이고, 작가에 따라 어떤 성향이 더 강한가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김영태 화백의 회화도 큰 범주에서는 그런 남도회화 양식에 속하면서 일요화가회 등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전파도 해 왔다. 펼쳐진 자연풍경도 어떤 부분을 어떻게 화폭에 담아내는가가 작가의 화면구성력이고 회화적 감각이다. 김영태 화백은 도시와 연접한 산야와 삶의 현장과 맞물린 포구, 순발력 있는 필치로 포착해낸 인물 등을 위주로 구상회화를 펼쳐 왔다. 그러면서도 지나친 왜곡은 삼가고, 자연 본래의 색보다는 화면공간 안의 색채효과로 조율하면서 생기 넘치는 화폭을 일구고자 하였다. 그런 점에서 남도 구상회화의 큰 봉우리인 오지호와 임직순의 회화를 융합시키면서 중후한 색채의 독자적 회화세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 조인호 (광주미술문화연구소 대표) 김영태 <2월의 무등산>, 2015, 캔버스에 유채, 60.6x72.7cm, 함평군립미술관 소장 김영태 <월출산>, 2008, 캔버스에 유채, 60.6x72.7cm, 함평군립미술관 소장 김영태 <히말라야가 보이는 곳>, 1993, 캔버스에 유채, 45.5x53cm, 함평군립미술관 소장 김영태 <마사이족>, 1996, 캔버스에 유채, 45.5x53cm, 함평군립미술관 소장 함평군립미술관 기획 김영태 화백 초대전 '백화난만' 전시 일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