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에서 피어나는 꽃-홍지애의 회화세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5-06-15 12:51 조회9,196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 홍지애 <滿開> 2013, 캔버스에 유화, 72x53cm 선인장에서 피어나는 꽃- 객관화된 나와의 공명(共鳴) 홍지애의 회화세계 김병헌 (의재미술관 학예실장) 요즈음 홍지애 작가의 선인장과 같은 작품들을 얼핏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이 그녀를 사실적인 회화작품을 그리는 작가로 인식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작품들은 누가 보더라도 실제의 선인장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 즉 사실적인 것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에 있어서 이와 같은 그림들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연주의(naturalism)에 속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간단히 말해서 미술에서의 자연주의란 ‘자연의 모방(mimesis of nature)’을 원리로 하는 것으로서 사물이나 사건, 현상 등을 흉내 내어(mimic) 다시 보여주는 것(representation)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홍지애의 작품들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자연주의 미술처럼 보일지라도, 자연 대상인 선인장과 그것에서 피는 꽃은 외면적인 모습이 그대로 옮겨지는 자연주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가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 반영된 것에 더 가까운 낭만주의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세기의 낭만주의 미술은 작가 개인의 주관적인 정서(emotion)를 표현하는 것을 원리로 삼는 표현주의(expressionism) 미술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연의 대상은 일종의 작가의 정서를 담아내기 위한 하나의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낭만주의 미술비평의 대표자들 중 하나인 영국의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에 따르면, 예술이란 미(beauty)를 실현하는 것으로서 자연에 나타나는 무한하고 영원한 통일된 신적인 아름다움인 ‘유형미(typical beauty)’나 생명의 약동 속에서 나타나는 개별적인 생물이 지닌 생명의 아름다움인 ‘생명미(vital beauty)’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홍지애의 작품 역시 눈에 보이는 대상을 고대로 모방해서 재현하는 것인 자연주의 미술이 아니라 일종의 낭만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녀의 작품을 단순히 작가의 주관적인 정서가 표현된 것이라고 그렇게만 말하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보다 애틋한 감정이 들어 있으며 그것은 그녀의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삶의 흔적과 같은 어떤 것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할머니 댁 마당에서 가시가 가득한 선인장 화분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다지 예쁘지도 않고 못생기기까지 한 가시투성이의 선인장을 할머니께서 왜 키우실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동안 의문으로 가득 찼던 선인장에서 아름답게 활짝 피어난 꽃의 자태를 바라보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며, 이것은 그녀의 뇌리에 할머니와의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선인장과 활짝 핀 꽃은 홍지애 작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이자 할머니와의 소중한 사랑의 기억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이입 미학(Einfühlungsästhetik, aesthetics of empathy)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테오도르 립스(Theodor Lipps, 1851~1914)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할 경우, 객관적인 지각표상(客觀的 知覺表象)과 주관적인 감정(主觀的 感情)의 일치(一致), 공명(共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빨간 장미를 보면서 ‘열정적인 장미’라고 느끼거나 빛을 보고 ‘따뜻한 빛’이라고, 곡선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음악을 ‘슬픈 음악’으로 등등 이런 식으로 그 사물을 느낀다는 것은 자기의 감정을 그 사물 가운데로 옮겨 넣어서, 즉 이입함으로써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감정이입은 일종의 인간의 정신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립스는 여기서 생겨나는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쾌감과는 다른 정신적인 쾌감이며, 우리가 이러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딴 것으로부터 장애를 받지 않고 자유로울 때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쾌감은 일종의 자아가치감정(Selbstwertgefühl)이자 우리의 내면적인 삶이 딴 것으로부터 부정되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생기는 삶의 감정(Lebensgefühl)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정신적인 쾌감이 모두 미적인 쾌감은 아니며 지적인 쾌감이나 실천적인 쾌감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는 미적인 쾌감이 되는 경우란 정신적인 쾌감이 내면에서, 즉 주관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바깥, 즉 객관화되어야 미적쾌감이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내면의 삶이 적극적으로 객관화되어야 미적인 쾌감이 된다는 것으로 결국 이런 미적인 쾌감이란 객관화된 자아가치감정을 말하는 것이 된다. 홍지에 작가의 작품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이와 같은 립스의 감정이입에 더하여 로베르트 빌헬름 보링어(Robert Wilhelm Worringer, 1881~1965)의 <추상과 감정이입, Abstraktion und Einfühlung>(1908)을 읽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보링어의 1906년도 뮌헨大 박사논문(Dissertation)이자 자신의 주저가 된 이 책은 앞서 말한 립스의 ‘감정이입론’과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 1858~1905)의 주요 개념인 ‘예술의욕(의지)(Kunstwollen, will-to-art)’를 토대로 쓴 것이다. 여기서의 주요 내용은 미술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예술의욕’이 표현된 것이며, 이 예술의욕은 인간의 심리적인 ‘추상충동(Abstraktionsdrang, the urge to abstraction)’과 ‘감정이입충동(Einfühlungsdrang, the urge to empathy)’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주관이 그 대상에 자기의 감정을 집어넣어서 그것을 느끼고자하는, 감정이입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주관과 그 대상이 친화적인 관계에 있어야만 생기는 것으로 그것과 적대관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와 반대로 추상충동은 자연이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정신적인 공포감을 야기할 때 발동하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인간은 자연을 기하학적인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려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외부자연이 우리와 범신론적인 친화관계에 있을 때는 그 대상에 자기의 감정을 이입하려는 감정이입충동에 의한 예술의욕의 표현으로 자연주의 미술이 생겨나고 자연이 우리에게 적대적인 경우에는 그것을 기하학적으로 재구성하여 심리적인 안정을 얻으려는 추상충동에 의한 예술의욕의 표현으로 추상미술이 생겨나는 것이다. 필자는 홍지애 작가 또한 선인장과 거기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할머니와의 친숙했던 경험이 오버랩되어 자신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친숙함과 일종의 자유로운 생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며 이 감정을 마치 타자의 감정처럼 객관화시켜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친숙함 속에서 그녀는 자신과 하나가 되는 내적인 공감과 일치를 경험했으리라 짐작하는 바이다.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순간 이외의 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온전히 그것에만 몰입이 된다...오랜 시간을 거쳐 홀연히 개화한 선인장, 유년시절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추억을 담는 동안 시각적 아름다움과 몰입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행복했다...이번 작업의 선인장 꽃의 만개는 내가 받은 사랑의 기억이며 다가올 이별에의 안타까움의 상징이다.” -작가노트 中- ※ 이 글은 홍지애의 포트폴리오를 위해 작가요청에 의해 작성된 평문입니다. 글이나 사진을 이용하시려면 작가나 필자에게 사전 허락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홍지애 <만개> 2013, 캔버스에 유화, 117x73c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