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청화백자에 담긴 품격과 상징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5-03-19 08:30 조회11,453회 댓글0건 관련링크 이전글 다음글 목록 본문 ▲ 구름과 용이 그려진 조선중기 청화백자항아리(16∼17세기)조선 청화백자에 담긴 품격과 상징미 국립광주박물관 특별기획전의례용 어기 완상용 보석그림독자적 우리 멋 담긴 문화유물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조선청화백자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조선청화, 푸른빛에 물들다’라는 이름으로 5월 10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그야말로 푸른빛의 보석그림 같은 청화백자를 제대로 음미해 볼 수 있는 기회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삼성미술관리움 등 공사립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명품 청화백자들이 한자리에 모아져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백자는 그릇을 꾸미는 재료와 기법에 따라 순백자와 분청사기, 채색도자로 나눌 수 있다. 채색이 가미된 백자는 청화·철회백자가 대부분이고, 더러는 붉은 빛을 내는 진사나 짙은 흑갈색의 철채가 곁들여지기도 한다. 순백자는 조선초기부터 말기까지 꾸준히 이어지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자기다. 백자토와 유약의 질이 좋아져 그릇의 흰빛도 맑아지고, 애써 꾸미려는 의도나 기교도 벗어버린 무심하고도 순박한 멋은 단연 한국도자의 백미다. 고려청자나 조선 분청사기가 시간이 흐를수록 밀집 반복되는 정형무늬의 틀을 풀고 점차 소략하고도 허허로운 무심의 공간을 담아내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선백자의 절제된 꾸밈이나 자연스러운 형태미는 미학자 고유섭이 말한 ‘무기교의 기교, 구수한 큰 맛’이라는 한국미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 백자의 비어있는 공간에 푸른 색 그림을 간결하게 올린 청화는 그야말로 귀티나는 명품들이다. 코발트 안료가 워낙에 귀하기도 하거니와, 정신을 다스리는 완상용으로서 어지러이 색 쓰는 것을 절제했던 조선시대 성리학 문화의 멋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점은 같은 시기 중국에서 명나라 화려한 오채부터 청왕조의 강희·건륭년간에 청화백자 그릇 전체에 보상화무늬나 산수인물 등이 섬세하고도 빽빽하게 채워지거나, 오채·분채·협채·금채 등 훨씬 화려해진 채색무늬 꾸밈이 주류를 이루는 것과 크게 대조된다. 또한, 임진란 이후 형성된 일본 백자문화에서 선명한 원색, 화려한 금색들과 더불어 정교한 문양들로 디자인된 에도시대 ‘소메츠키’(청화백자) 양식과도 비교된다. 특히 메이지유신 이후 서양풍 그림장식이나 기형들이 제작되면서 한국의 청화와는 다른 도자문화를 보인다. 조선청화는 한정된 수급 때문에 주로 왕실 고관귀족 위주로 사용되면서 당시 문화지배층의 미감을 반영한 회화적 요소들이 많다. 특히, 구름과 용, 대나무·매화 같은 사군자류가 그런 예다. 이 가운데 용을 그린 항아리들은 왕실에서 임금의 절대권위를 상징하는 ‘어기’였다. 아래에 파도무늬나 연꽃잎 무늬띠를 두르고 몸체를 휘돌아 구름과 더불어 허공을 나는 용을 그려 넣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용그림에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발가락 수가 15세기는 3개, 16∼17세기는 네 개이고 그릇 크기도 20∼30cm정도인데, 18세기에는 다섯 개 발가락에 크기가 50cm를 넘나드는 것들이 많다. 영·정조시대 조선의 주체성을 세우고 왕의 권위를 강화하려던 통치이념이 반영된 듯하다. 이는 이후 19세기에 주둥이 띠가 높아지고 크기는 유지되면서도 용의 발가락이 대부분 다시 네 개인 것과도 비교된다. 도상의 상징성 못지않게 빼어난 화격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임금님이 쓰실 백자의 도화작업에 도화서 일급화원들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문화사들이 용의 화본뿐 아니라 중요한 작업에는 직접 광주분원에 나가 백자에 청화그림을 그려 올렸던 것이다. 품격 있는 청화백자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미적 취향을 담은 사군자류 그림이 많다. 소박한 흰 바탕에 먹색을 내는 철회사군자 백자 못지않게 푸른 색감이 정신을 맑히는 청화그림을 귀물로 여겼던 것이다. 조선 초기 문인화가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대나무는 장부의 지조를, 국화는 은일자의 모습을, 매화는 품격 있는 덕이라는 군자의 미덕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림이나 도자기 무늬로 그려 넣어 가까이 두고 완상하였다고 적고 있다. 귀한만큼 고위층 위주로 사용되던 청화백자는 18∼19세기에 중국 일본에서 들어오는 양도 많아지고, 질은 낮지만 토청을 사용한 청화백자도 늘어간다. 게다가 조선말에 이르면 광주분원이 민요로 전환되면서 사용층이 훨씬 넓어지고, 그에 따라 일상적인 문화나 민속요소들도 늘어나면서 서민적인 소박미를 담기도 한다. 분재나 화조, 봉황 같은 상류층 문화와 함께, 풀꽃이나 학·사슴·영지·해태·까치호랑이 같은 민화풍의 기복벽사 민간신앙도 담겨진다.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우리문화의 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시대에 따라, 제작처나 용도, 사용자에 따라 여러 층위의 문화를 보여주는 청화백자들은 우리 미의식의 흐름을 살펴 볼 수 있는 귀한 문화유물들이다. - 조인호의 미술이야기 (전남일보, 2015.3.18)◀ 괴석과 대나무분재그림 청화백자항아리.18세기 / ▲ 포도와 원숭이그림 청화백자항아리.18∼19세기 ▶ 양각매죽그림 청화백자병.19세기 ▲ 청화백자-매화 대나무 소나무그림 청화백자 지통/ 매화 대나무그림 청화백자 연적.18∼19세기◀ 청화백자-구름과 물고기그림 청화백자 대접.19세기 ▶ 꽃그림 청화백자합. 15∼16세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이전글 다음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