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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송규 화백 개인전- '다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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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4-09-19 19:24 조회10,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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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송규 개인

    다 괜찮을 거야

     

    원로 정송규 화백의 열네 번째 개인전이 그가 운영하는 무등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93일부터 1120일까지 80여 일간 비교적 긴 시간을 두고 관객을 맞이하는 이 전시는 다 괜찮을 거야라는 화가 자신과 세상을 향한 긍정과 위무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미술관 1~2층 공간에 크고 작은 캔버스 회화와 소파나 생활단지를 이용한 설치까지 최근작 40여점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한쪽 긴 벽 쪽을 할애해서 초기 누드나 풍경, 정물 등의 구상회화부터 주관적 형상의 해석과 변형이 과감히 반영된 반추상, 또는 기하학적 요소가 다분한 비구상회화, 조각보로부터 추출해낸 시각 점묘들의 화면구성까지 이전의 작품들을 각 테마별로 차곡차곡 포개두어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들춰볼 수 있도록 한 전시구성이 독특하기도 하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노암 큐레이터(문화역 서울 284 예술감독, 갤러리 휴 대표)의 글을 통해 정송규 화백의 회화세계를 폭넓게 접해 볼 수 있도록 소개한다.

      

    자기 확신과 긍정적 비전의 길

    김노암 (문화역서울284 예술감독)


    정송규 작가는
    2006년 광주시립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여성미술가로는 처음으로 초대전을 연 바 있다. 작가는 작품 활동과 함께 광주 현대미술문화 발전을 위해 2006년부터 현재까지 무등현대미술관과 창작레지던시를 운영하며 신예작가들의 창작의 산파역할을 해오고 있다.
    정송규 작가의 작품세계는 90년대 말을 전환기로 하여 그 이전의 인체를 주제로 한 구상화의 시기와 그 이후 모정(母情)과 환희(歡喜, delight)를 키워드로 삼고 우리 전통의 조각보에서 기원한 화사하면서도 단순한 채색과 조형을 통해 생활과 예술의 결합을 시도하는 추상의 시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는 전통과 창의, 일상과 비일상, 낯섬과 공감 등 우리 미술계의 오랜 난제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혀온 한 여성미술가의 담대하면서도 긍정하는 작가의 태도와 삶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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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그의 작품에 깊이 침잠해 있는 의미와 핵심에 접근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동시에 그러한 작품세계가 태동하게 된 예술계 내외의 배경과 역사적 맥락을 두루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작가는 활동 초기부터 한국인의 정서와 생활감각에서 출발한 다양한 체험과 인식에 기반 한 구상작품에 매진해왔으며 1990년대 말 깊은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조형적 표현보다는 주제의식과 관념에 집중하는 보다 추상적인 작업으로 크게 선회하였다.

    정송규 작가의 작업에 대한 많은 전문가들의 생각은 일정한 공감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미술평론가 장석원은 미니멀 성향의 덤덤한 단순성을 바탕에 깔면서 한 점의 형태로 귀결되는 작은 네모들의 배열과 구성에 미묘한 표정을 불어넣고 있다. 무수히 많은 점들로 점유된 행복한 화면 안에는 장독 같은 형태가 정서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추상은 다시 친화적 구상 형태와 연결되어 미묘한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때로는 점들의 행렬이 캔버스와 캔버스를 넘어 운율처럼 흐르면서 춤을 추듯, 감성적 흐름에 맡기는 듯한 자유로움을 준다.”

    중국의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인 황두는
    환희 계열 중에서 정송규는 추상성을 회화의 중심에 놓았고 중복성과 반복성을 띈 선들은 모두 시간과 운동 중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는 절대적인 객관성을 배제하였고 색채정감을 빛의 정감으로 이해하였고 빛에 대한 정감을 생활과 사랑에 대한 정감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화면에서의 명확한 통일성을 파괴하였다. 그는 일상생활의 심미를 해독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상의 단락들을 생동한 예술형식으로 표현하였다.”

    미학자 김광명은
    정송규에 있어 한 점, 한 획이 기본이 되어서 기쁨을 이룬다. 끊임없는 반복과 종합으로 이어지는 정송규의 작업은 성실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는 단순한 기하학적 추상이 아니라 마음의 관조와 평온이 온전히 배어 있다. 오랜 인고의 작업에서 오는 성취감은 조각보에서 비롯하였으나 이는 곧 삶의 이야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의 삶이란 얼핏 보기에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실은 매우 정확하며 때론 엄격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송규는 조각보를 통해 조각보를 넘어서는 예술적 삶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그의 작품은 계획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가 무수한 변화의 요인을 내장하고 있어 가변성이 풍부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이 단순히 작가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 생명을 지니는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유기적 인지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그림이 작가를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하나하나의 면들을 그려나가고 있지만 작은 면들은 직조되면서 스스로의 생명을 지니는 존재로서 숨을 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한 작은 면들의 집체가 거대한 생명체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놓는다. 단어 하나하나는 말이 되지 않지만 그것들이 연결되면서 말이 되고 의미가 되듯이 정송규의 작품도 면들의 직조란 또하나의 과정을 거침으로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보았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작가 정송규의 작품세계는 창작과 일상의 삶의 관계를 가능한 결합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생의 깊은 성찰을 통해 모정과 모정을 은유하는 한국 전통의 보자기의 조형과정과 형태를 환희를 키워드로 하여 적극적으로 끌어온 미니멀 계열에 속하는 추상작업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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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작품세계를 설명하는 중요한 관념이 모정(母情)과 환희(歡喜)는 살아있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성찰과 긍정의 정신을 담고 있다. 모정에서는 여성의 평범한 지적 능력을 넘어선 삶과 죽음, 관계, 그리고 영속하는 것들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뇌를 담고 있다. 사랑보다 강한 것이 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평범한 인간의 사랑을 넘어 신적 사랑의 순수한 자기희생까지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사랑이 극단에 이르면 정이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 낭만과 비전은 세월과 함께 성숙하고 또 퇴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통념은 창작자로서의 집중을 잃지 않는 작가들에 의해 점점 더 설득력을 잃고 있다. 예술에 대한 사랑과 집중은 예술과 창작자와 매개자와 감상자를 포함한 전체 예술 관계자들, 예술행위자들이 공감하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한국의 많은 여성작가들은 자기 정체성, 사회에서의 지위, 예술가로서의 자존감 등 다양하고 복잡한 긴장의 상태를 견뎌야 한다. 부지불식간에 여성을 비가시화하고 부차적인 존재로 만드는 사회구조, 무의식의 굴레로 인해 많은 여성예술가들은 그 사회와 인습이 허용하는 극단의 경계까지 치고 나아갔으나 머뭇거리다 퇴보하곤 하였다. 정송규 작가는 예술과 생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았던, 너무 깊이 이해했던 여성들이 저평가되는 가부장적 전통과 사회의 구조를 오랜 기간 관통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반복해서 주제로 삼은 모정과 환희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일과 의미, 여성으로서의 예술가가 감내하고 극복해온 사람에 대한 찬란한 자기 인정이다. 예술가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아야한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작가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희열, 환희를 맛보는 것이다. 캔버스 화면을 촘촘히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과정은 문득 깨달음의 경지인 돈오(頓悟)로 나아가는 점진적 과정인 것이다. 또한 그토록 오랜 정신적 집중과 노동의 과정을 반복해낼 수 있는 것은 그 경지의 기쁨과 또한 작자로서의 자기 확신과 긍정적 비전의 힘을 신뢰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정송규 작가는 예술가로서의 창작과정과 태도와 한 집안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또한 같은 분야에 헌신하는 작가들의 동료이자 선배로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2007년 개관한 무등현대미술관을 운영하면서 감내해야할 무수한 현실적 난관과 고뇌를 예술을 향한 비전과 낙관적 삶의 태도로 가로질러 왔다. 그것은 확장된 창작으로, 한편으로는 수동적이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모성의 미덕과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적 열정과 능동적인 주체로서 예술가의 태도를 견지해 온 것이다. 작가의 작품에 재현되어 있는 것은 단지 재료와 물질의 미학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고 깊이 관계해온 한 인간이자 예술가가 오랜 기간 쌓아온 것이다. 예술가로서 무언가를 향해 홀린 채 묵묵히 나아가는 경지는 변덕스럽고 좌충우돌하는 가볍고 혼란한 시대일수록 점점 더 중요한 미덕일 것이다.

    한 예술가에게는 여성성과 남성성, 창작자와 감상자가 모두 들어있다. 또한 창작과 동시에 감상이라는 이중의 운동이 한 사람의 의식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정송규 작가의 작업에도 우리는 그러한 복합적이며 이중의 운동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구상과 추상, 관념적 지향과 구체적인 물질적 접촉의 이중의 운동을 동시에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시간을 작가는 더 많이 더 깊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산술적 시간보다 더 많은 또는 더 섬세한 시간을 사는 것이다. 같은 크기의 캔버스가 작가의 손을 통해 점점 입자화하며 존재, 시간의 과잉처럼 변모하는 것은 아닐까.
    대단히 섬세하고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되어 있는 것이 예술가의 의식인 까닭에 우리는 정송규 작가의 예를 통해 왜 예술가들은 영원히 살게 되는지 또는 살고자 하는지 그리고 왜 여성 작가들을 진지하게 연구해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창작은 일상과 비일상, 예술과 노동, 개인과 사회 사이의 승화(昇華)를 요구한다. 승화는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융합된 상태일 것이다. 정송규 작가의 작품 세계도 또한 많은 전문가들의 관심과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부분 연구되어야 할 문제들을 담고 있다.

    돌아보면 90년대 말 정송규 작가의 작업이 보인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선회는 깊은 인상을 준다. 좀 더 그 의미를 생각할 볼 문제이다. 여러 사례를 통해 강단미술사에서 분류하는 개념적 추상이 반드시 조형적 미니멀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많은 예술가들이 추상과 구상, 개념과 질료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다양한 체험을 숨김없이 보여줬는지 설명할 수 없으니 말이다. 개념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조형효과와 조형주의자들의 사려 깊은 사유는 밀접하게 이웃하고 있다는 이해와 함께, 향후 정송규 작가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식적 변화와 활동의 확장성을 보여준 작가들에 대해 세심한 관람과 분석을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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