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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흔적으로서 '인생 지문' - 이철수 목판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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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광주미연 작성일13-04-24 18:41 조회13,3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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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수, <하늘 이고 저물도록>, 2011, 목판화


    ▶ 이철수, <길을 내>, 2011. 목판화

     

    삶의 흔적으로서 인생 지문

    - 이철수 목판화 초대전


      인생살이는 어떤 조건과 계기들에 의해 수시로 길이 바뀐다. 그 길은 개인의 삶과 시대의 흔적을 만들고 역사를 일구어 간다. 변혁의 80년대를 관통해 온 세대들도 그 치열했던 저항과 투쟁의 현장에서 90년대 이후 일상 삶과 서정 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그들 활동이 시민사회의 성숙과 더불어 문화 민주주의를 일구어 가는데 큰 몫을 맡아 왔다.

      상록전시관에서 이철수 목판화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그는 80년대 이른바 민족민중미술 목판화운동의 주역으로 현장을 누비다가 변화된 시대 속에서 자연과 생명세상으로 새롭게 길을 내어 온 현실주의 작가다. ‘아이들 뒤따라 올텐데’라는 전시회 이름처럼, 그는 목판화를 통해 시대문화의 길을 내고자 했다. 이번 전시회에 다시 내보인 <거리에서>, <밥이 하늘입니다>, <새벽이 온다, 북을 쳐라>처럼 80년대 예술의 사회적 복무를 우선한 선전성 위주의 흑백목판화 운동에 앞장섰던 작가다. 그만큼 그의 8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시대별 작품들은 한국 현대사와 우리 미술의 큰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그랬던 그가 80년대 말에서 90년대로 시대의 고개를 넘던 중 잠시 공백기에 묻히는가 싶은 시기가 있었다. 89년 독일과 스위스 몇몇 도시의 순회전시 중에 부딪치게 된 ‘전체주의 냄새’라는 평에 당혹스러웠던 그는, 그동안의 작업에 스스로 반문하며 그림의 본질과 세상에서의 쓰임새를 되짚어보는 깊은 화두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작업의 근본부터 다시 곧추 세우려는 치열한 갈등과 번민, 성찰의 시간을 가지면서 작품의 소재나 표현형식에서 세상으로 향한 자신의 길을 찾고자 하였다.  

      짧고도 긴 숙고 끝에 결국 그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미술현장에 돌아왔다. 예술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좌표설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의 거친 호흡과 날 것 같은 칼맛들을 다스리고 은유와 함축으로 걸러낸 삶의 메시지를 일상의 모습으로 정제시킨 목판화 작업으로 바뀌어 있었다. 힘의 결집이 필요하던 의분에 찬 시대의 집단 논리와 관념적 이데올로기를 털어내고, 대신 자연의 생명 이치와 개별 존재의 일상들, 걸림 없는 사유와 소소한 것 하나에서도 삶의 진실한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런 순간순간의 교감과 깨우침들을 마음속에서 응집시켜 선화(禪畵) 같은 목판화로 옮겨내었다.

      그의 작품들은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쉽게 읽혀지는 함축적인 은유와 촌철 같은 풍자를 함께 지니고 있다. 마치 수행자처럼 ‘산하대지가 한권의 경전’인양 자연을 도량 삼고, 일상사 하나하나에서 마음을 수련하며, 세파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세상을 통찰하고자 하는 고요한 평정심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생각을 이끄는 그림뿐 아니라 시어나 경구 같은 글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메시지의 여운을 남긴다. 이번 전시작품 가운데 ‘길’과 ‘지문’ 연작에 마음이 간다. 표제 작품인 <아이들 뒤따라 올텐데>도 바람에 흩날리는 잎새들 사이로 정겹게 걸어가는 부부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뒤를 따라 올 젊은 아이들에 대한 기대는 비어있는 여지로 남겨 놓았다. 서너 가닥의 선으로 집약한 <길> 연작들의 이미지도 그렇고, ‘당신이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 사람들이 길이라 부르겠지’ ‘길이 보이지 않는 거기서 길을 내’ 등등의 짧은 글을 붙여 둔 그림들도 그렇다.

      ‘지문’ 형태의 밭일 연작 중 조금 더디 저무는 저녁해를 아껴가며 밭고랑마다 올라 앉아 풀을 메는 아낙들의 <골 마중하는 마음>,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백장선사의 가르침대로 부지런히 돌 많은 밭을 도량삼아 몸도 얻고 마음도 얻고자 하는 <백장 이후>, 그렇게 저물도록 일하고 그만 들어가자 서로를 챙기는 부부에게 밥은 달고 잠은 깊을 거라는 <하늘 이고 저물도록>, 온 종일 괭이질로 밭고랑을 다듬고 노을빛으로 한 잔 걸친 듯 들녘을 뒤로 하는 <해질무렵> 등등 삶의 터전에서 노동의 흔적으로 짙게 찍힌 지문들을 새겨 놓았다.

      세상은 연푸른 봄이 한창이다. 물오른 대지에 밭고랑을 메고 이랑에 씨앗을 뿌려 새 생명을 싹티운다. 씨알들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푸르른 생명을 뻗어 올리다가 저마다 단내 나는 결실을 맺고, 잠시 휴식의 겨울나기를 지내고나면 또 새로운 봄의 생명을 티울 것이다. 세상살이에 닳아 사라지는 듯 싶어도 기어코 다시 돋아나는 열손가락 지문처럼, 세상의 뭍 생명들은 제 삶의 지문을 돋우며 늘 새롭게 봄을 일구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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